지하의 보편구원론? – Keith DeRose

GOTT-June 08, 2006

지하의 보편구원론?(Underground Universalism?)

Keith DeRose
2006년 6월 8일

제가 속한 신학적 진영에서 보편구원론은 거의 무신론에 가까운 개념입니다. 간음을 저지르는 것보다 더 두려운 일이며, 보편구원론자로 낙인이 찍히면 경력이 끝납니다. 이건 결정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어린 딸이 단지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위험한 이단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충격을 숨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일요일 오전 9시 이전에는 신학적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고 농담을 했고, 딸은 저를 놓아주었습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마지막 말씀과 그 이후의 말씀』(The Last Word and the Word After That)의 초반(정확히 7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화자인 댄은 복음주의 교회의 설교자인데, 대학교 신입생인 그의 딸이 막 보편구원론에 관심을 표현했습니다. 위에 인용된 구절 바로 직전에 딸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잠이 오지 않아서 어젯밤, 아니 사실 오늘 새벽에 인터넷에 접속해서 보편구원론에 관한 글을 읽었어요. 꽤 멋지게 들리던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설교자의 생각이 얼마나 빨리 보편구원론자로 보이는 것이 경력에 미칠 영향에까지 이르게 되는지 주목하세요. (저는 이것이 매우 현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맥클라렌은 오랫동안 설교자로 활동해 왔기 때문에 설교자의 반응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집에서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의 딸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그가 교회에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자신과 친분이 없는 대학생과 상담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 학생의 부모가 그녀에게 설교자와의 대화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물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떤 신학적 진영에서 보편구원론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지에 대해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의심이 듭니다. 맥클라렌의 캐릭터인 댄이 묘사한 상황(보편구원론자로 분류되는 것이 경력을 끝장내는 것)은 기독교 교회의 꽤 넓은 부분에서 실제 현실이며, 보편구원론자가 되는 것이 자동적으로 경력을 끝장내지는 않더라도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교회는 훨씬 더 많을 것이라는 의심입니다. 저는 이 상황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교자, 기독교 학교 교사와 기독교 대학 교수, 기타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와 기독교 공동체의 일반 구성원들도 상당한 압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많은 교회에서 보편구원론자로 “커밍아웃”한 경우, 사람들은 여러분이 주일학교 등에서 가르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부 교회에서는 “교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간주되어 그런 사람을 위한 절차에 따른 처분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잠재적 보편구원론자들이 그러한 압력으로 인해 “지하”로 밀려나 있는지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상당수가 그럴 것으로 생각됩니다. (제가 온라인에 올린 보편구원론 옹호 글을 보고, 여러 사람이 저에게 연락해서 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6월 6일에 올린 글에서 저는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하는 입장이 꽤나 인기 있는 것 같다고 언급했고, 이 입장은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다양한 유형의 압력이 없었다면 보편구원론자였을 것이라는, 또한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자신을 보편구원론자라고 밝히는 것보다 어느 정도는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고 그것도 막연한 추측일 뿐이지만, 이에 대해서도 꽤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5월 27일에 올린 글과 관련하여, 보편구원론자가 “잘못된 질문을 하고 있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동기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은 그들이 직면한 압박감 때문에 피하고 싶은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이유로 “희망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을 빠르게 덧붙이고 싶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증거가 너무 불충분하여 어느 한 쪽으로 입장을 취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6월 6일자 글의 토론을 참조하세요.) 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진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저와 다르게 증거를 읽었고, 그 증거가 보편구원론을 가리키는 것과는 멀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자신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희미한 희망을 보고 있으며, 그래서 보편구원론이 참인지 솔직히 의심하면서도 (그리고 아마도 강하게 의심하지만) 그것이 참이기를 바라는 “아득한 희망을 품고”(hoping against hope)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각자가 왜 희망적 입장을 취하는지에 대해 압박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아직 일요일 오전 9시 이전이기 때문에 이쯤에서 사람들을 안심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다양한 개별 사례들은 상당히 불분명하고, 당사자들조차도 자신의 입장이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종류의 압력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당한 고려 사항은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 즉 역사적으로나 현재적으로나 교회 전체와 자신이 소속된 일부 교회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가 자신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와 곤란한 처지를 피하려는 욕망의 영향을 받는 정도를 분별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스스로에게 정직한 사람들은 이러한 각 요인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문제 발생에 대한 두려움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상황은 이상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 목회자나 기독교 학교 및 대학의 선생님들에게 도움을 구하는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조언자들이 받는 압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지, 만약 해당되는 경우 조언자들이 보편구원론을 옹호했다가 소문이 나면 실제로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궁금합니다. 제가 꽤 보수적인 교회에 다닐 때 한 부목사가 저의 보편구원론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배정된 적이 있습니다. 그(물론 이 교회는 부목사가 ‘그’여야 할 만큼 보수적인 교회였습니다)가 반 보편구원론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을 때 우리 대화에 대한 제 인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의 생계와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능력이 거기에 달려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제가 그에게 제시한 이유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하던 중이었어요 하지만 그가 처한 상황을 깨닫고 나니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고, 그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저는 사람들이 목사님이나 선생님과 이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막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조언자들의 신뢰성을 훼손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압력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정직하게 사람들에게 그 상황을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토론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뚜껑’이 벗겨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궁금합니다: 다양한 교회에서 논의를 거쳐 보편구원론자가 되는 것이 괜찮아진다면 말이죠.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같은 궁금증을 가지고 있고, 뚜껑을 단단히 닫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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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joanna | June 08, 2006 at 10:56 PM
    이 사려 깊은 게시물에 감사드립니다, Keith (그리고 이전 게시물들도요). 신학 교육 / 사역의 세계가 제가 살고있는 학문적 세계와 얼마나 다른지를 다소 충격적으로 상기시켜줍니다. 제 직업 세계(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 포함)에서 지옥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사회적 왕따가 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종류의 지옥이든 믿는다는 것은 분명 최악의 근본주의로 간주될 것입니다. 저는 적어도 많은 신자들이 당신이 묘사 한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똑같이 걱정할 일입니다.
  • Chris King | June 08, 2006 at 11:10 PM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또한 개혁 교회에 얼마나 많은 은밀한 아르미니안들이 있는지, 또는 아르미니안 전통 속에 얼마나 많은 은밀한 칼빈주의자들이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그 문제에 대해 저는 근본적인 복음주의 교회에 동성애적 삶의 방식을 인정하지만 종교적 압력 때문에 “커밍아웃”하지 못하는 지하 운동이 있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성애를 죄로 간주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목회자들을 풀어줘야 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진보적인 문화에 비추어 볼 때, 그런 구시대적인 믿음을 실제로 강요하는 것은 너무 과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이러한 비꼬는 말이 부끄러운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지 정당한 고려 사항은 이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 즉 역사적으로나 현재적으로나 교회 전체와 자신이 소속된 일부 교회의 입장입니다.”

    저는 이것이 전적으로 정당한 고려 사항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서 제기하는 것과는 다른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보편구원론적 입장에 대한 나의 주장 중 하나는 그것이 교회의 역사적, 현재적 입장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저는 성경을 교회의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케빈 밴후저(Kevin Vanhoozer)의 말을 인용하자면, “교회는 단순히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그 실천이 성령에 의해 형성되고 가능해진 공동체”입니다. 저는 여기서 교회가 역사를 통틀어 성경을 완벽하게 해석해 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우리 개인의 전제가 전통의 관점을 자동적으로 압도하지 않도록 교회가 우리에게 충분히 영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Martin Downes | June 09, 2006 at 04:38 AM
    Keith, 이것은 매우 자극적인 게시물입니다. 두 가지 질문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이런 상황에 처한 보편구원론자들에게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입장을 밝히지 않고 지하로 들어가는 것도 여전히 선택 사항입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할 때 어떻게 정직하지 않다는 혐의를 피할 수 있습니까 (교회의 교리적 경계가 보편구원론을 거부한다고 가정할 때)?
  • Keith | June 09, 2006 at 12:44 PM

    당신은 이런 상황에 처한 보편구원론자들에게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가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나는 일반적으로 그렇다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어떤 도움이 될 만한 일반론적인 말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개별 사례가 워낙 다양하니까요. 하지만 몇 가지 고려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제가 글에서 말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편구원론자”로 묘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보편구원론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끼지만,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보편구원론에 찬성하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들 중 예를 들어 (보편구원론을 포함하여) 분명히 믿는 것이 있고, (반보편구원론을 포함하여)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 있어서, 이 둘이 충돌하고 있는 그런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제가 만난 사람 중 그런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보편구원론을 분명히 믿지만 “아직은 좀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하고 이 문제에 대해 일종의 개방성, 미결정성, 혼란스러움을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글에서 언급하는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요.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아서 개방성, 미결정성, 불확실성 등을 고백합니다.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그들은 더 친 보편구원론자일지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이 문제에 대한 전체 교회 또는 자신이 속한 교회의 일부의 입장을 고려하고 적절한 가중치를 부여하려는 정당한 욕구에 반해서, 문제가 발생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는 그들 자신에게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 Keith | June 09, 2006 at 12:56 PM
    저는 이 문제와 다른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서 새처럼 자유롭다고 느낀다는 것을 덧붙입니다. 제 직업(저는 예일대에서 철학을 가르칩니다.)은 어떤 식으로든 위협받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리더십 직책을 맡지 않아도 괜찮고, 제 보편구원론이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어쨌든 다른 문제로 인해 교회 리더십에서 빠져야 합니다. 일부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저의 이러한 견해에 대해 약간의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으며, 어쨌든 더 전통적인 견해를 취하는 경우에도 다른 친구나 가족으로부터 똑같이 비난을 받았을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생계가 위협받을 수 있는 보다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을 매우 주저합니다. 기독교 기관의 일원이 된다는 것에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런 기관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고, 특히 그들이 가진 신학적 견해 때문에 그들이 일하는 곳에서의 상황이 상당히 불편해질 수도 있었던 사람들, 지금의 제가 그런 것처럼 새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곳에 있었다면 여러모로 더 행복했을지도 모를 사람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고, 저는 그들의 존재로 인해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은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고(일부만 언급했지만), 앞서 말했듯이 개인마다 처한 상황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정리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분명 용기가 부족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가 어떤 경우인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 Clark | June 10, 2006 at 02:08 AM
    나는 당신의 입장이 흥미롭다고 생각하며 확실히 블로그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의 논증은 보다 일반론적인 것 같으므로 저의 생각도 보다 일반론적입니다. 즉, 제가 저의 비-보편구원론적 견해를 성경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지 마십시오. 블로그는 책이나 논문이 아닙니다. 제 견해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성경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을 받아들이세요. 저는 단지 당신의 글에서 당신이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나는 당신이 성경에 대한 당신의 보편구원론적 해석이 옳다고 결론 내린, 어쩌면 “굳어진”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견해가 순전히 교리적인 것이며, 그에 대한 당신의 열정에는 개인적, 상황적, 관계적, 제도적 영향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편구원론자가 아닌 많은 (대부분? 전부?)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오직 또는 주로 제도적 영향 때문에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재해석하고 보편구원론에 대해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자유롭지 못한데, 이는 그들이 그 결과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접근 방식이 단지 당신의 논점을 주장하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방법인지, 아니면 당신이 정말로 성경에 대한 비-보편구원론적인 모든 해석이 당신에게는 이단적이고, 정통 견해를 받아들이는 수백만 명이 아직 그것을 모를 뿐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자신을 일종의 루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보편구원론이 진리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진리이기를 바라는 사람 중 한 사람으로서, 제 입장은 평판, 직업, 가르치는 권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특정 성경에 대한 보편구원론적 해석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지 않고 모호하다는 것(어쨌든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2) 성경에서 심판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가르침이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다는 것, 3) 나의 인간 영혼은 영원한 심판에 대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영과 말씀이 그것을 선포하라고 지시한다는 딜레마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희망과 실재 사이의 내재적 갈등을 인정하면서도 보편구원론을 보편적 교리로 정당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구속의 신비를 느슨하게 붙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심판의 실재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가르치는 압도적인 양의 성경 구절들을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보다 더 방어 가능한 입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결국에는 모든 사람에게 “겨자씨”와 같은 믿음의 씨앗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두가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내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창조주와 함께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소망하게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것을 열망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의 공의가 그것을 막는다는 것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예정과 자유의지와 마찬가지로, 저는 구속을 우리의 유한한 정신으로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성경의 신비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보편구원론을 주장하는 논리를 펴는 것은 결정론의 논리를 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리에 단추를 채우고 신비를 제거하려는 욕망은 인위적으로 굳어진 견해를 낳습니다.

    아시다시피 당신의 견해는 매우 도발적입니다. 저는 당신과 “논쟁”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글에 담긴 생각과 견해에 응답하고 상호 작용하려는 것임을 알아주세요. 이 주제는 몇몇 블로그 게시물에 담기에는 너무 큰 주제이며, 블로그 게시글은 실제로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논쟁의 경계를 정의하는 데에만 유용할 것입니다.
  • Keith DeRose | June 10, 2006 at 09:56 AM

    저는 단지 당신의 글에서 당신이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Clark, 당신은 아마도 당신이 내가 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내가 실제로 말하는 것에 충실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서 잘 소통이 안 되는 것 같거든요: 행간을 읽기 시작하면 실제로는 없는 내용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나 당신은 보편구원론자가 아닌 많은 (대부분? 전부?)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오직 또는 주로 제도적 영향 때문에 그런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제안하는 것 같습니다.

    왜 “(대부분? 전부?)”인가요? 나는 “전부”의 가능성을 명시적으로 배제했습니다. “이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이유로 “희망적”인 입장을 취한다는 점을 빠르게 덧붙이고 싶습니다.”로 시작하는 단락을 참조하십시오. (제가 충분히 빠르게 덧붙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을 제안하거나 그럴 의도를 가지고 쓴 부분도 없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다수”와 “상당수”이며, 그것조차도 주장이 아니라 추측으로 표현했습니다. 이는 제가 해당 유형의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에 근거하여 제가 꽤 자신 있게 말하는 의혹입니다. 하지만 제가 그 이상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저는 대부분의 또는 모든 비보편구원론자들이 제가 언급하는 유형의 압력에 의해서만 또는 주로 그러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추측합니다.

    나는 당신이 성경에 대한 당신의 보편구원론적 해석이 옳다고 결론 내린, 어쩌면 “굳어진”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요,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혀 공정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의 글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 참이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에서 나는 확신하지 않는다고 명시적으로 말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편하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불확실한 상태에서 제가 취하는 입장, 즉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입장에 대해 설명하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상당히 확신이 없는 입장은 “적어도 어느 정도 안정적”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한동안 이 입장을 견지해왔고, 그 모든 시간 동안 이에 반대하는 논증들을 꽤 부지런히 찾아보았기 때문에 적어도 가장 좋은 논증은 대부분 보았다고 봐야 할 것이고, 따라서 가까운 장래에 제 입장이 바뀔 것 같지는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다른 쪽의 주장을 듣는 데 매우 열려 있습니다. 어쨌든,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 참이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에서 말한 어떤 내용도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를 통해 현재 게시물에서 철회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입장에 대한 당신의 설명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 게시물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 참이 되기를 바라는 것에 대해” 게시물의 이 부분에서 나온 것일까요?

    저는 보편구원론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성경적 증거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이해에 따르면 보편구원론이 승리합니다. (“분명히?” 글쎄요, 제가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에 대한 저의 변호(“보편구원론과 성경”)를 시작할 때 저는 보편구원론이 꽤나 분명한 승자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단에서 불확실성을 표현하고, 곧이어 제가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조차 편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저로서는 당신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에 대해 더 이상 추측하지 않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냥 당신이 저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서로 소통이 잘 안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스스로 제 입장을 어떻게 설명했는지에 비추어 볼 때, 당신이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완전히 불공정하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이런 접근 방식이 단지 당신의 논점을 주장하기 위한 정직하지 못한 방법인지, 아니면 당신이 정말로 성경에 대한 비-보편구원론적인 모든 해석이 당신에게는 이단적이고, 정통 견해를 받아들이는 수백만 명이 아직 그것을 모를 뿐인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자신을 일종의 루터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서로 소통이 매우 안 되고 있습니다. 당신은 저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장 거슬리는 것은 제가 첫 번째 게시물(‘보편구원론의 문제점’?)의 댓글 섹션에서 불평했던 것과 동일한 문제가 여기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성경적 근거에 대해 논쟁하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즉, 제가 저의 비-보편구원론적 견해를 성경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고 지적하지 마십시오. 블로그는 책이나 논문이 아닙니다. 제 견해가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교리적으로 건전하고 성경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점을 받아들이세요. 저는 단지 당신의 글에서 당신이 말한 것으로 생각되는 것에 응답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당신은 성경적 근거에 대한 당신의 결론을 매우 강력한 표현으로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언어가 그다지 정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저를 “심판의 실재와 하나님과의 영원한 분리를 가르치는 압도적인 양의 성경 구절들을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다고 표현한 것에 대해 궁금합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심판의 실재”를 전혀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게 형벌의 실재에 대한 지지를 “적당히 얼버무리”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 사이의 유일한 문제는 “영원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무엇이 “압도적인” 것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해석을 위해서는 당신은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처벌에 대한 모든 진술, 심지어 그 기간에 대해 완전히 침묵하는 진술까지 모두 세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형벌 구절에 대한 저의 접근 (“적당히 얼버무리기”)에 관심이있는 분들을 위해 그것은 “보편구원론과 성경”의 10절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논쟁의 핵심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이 여기서 하고 싶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길 원하는지 정확히 알기가 어렵습니다. 반대 논증은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제 주장을 공격하고 싶으신 것 같으니 이쯤에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Mark Poole | June 10, 2006 at 08:07 PM
    흥미로운 시리즈 글들입니다. 저는 Chris가 보편구원론이 “교회의 역사적, 현재적 입장과 크게 동떨어져 있다”고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기독교 전통과 신학 내의 보편구원론적 관점의 역사에 대한 많은 글들을 다른 곳에서 많이 찾을 수 있으며, 이러한 견해는 다시 신약과 히브리어 성경 내의 보편구원론적 경향으로 추적될 수 있습니다. 저는 보편구원론을 칼빈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전환된 것으로 생각하고 싶습니다. TULIP 약어를 사용한 몇 가지 설명도 보았습니다. 여기 하나 있습니다:
    http://hellmyth.blogspot.com/2006/05/flower-of-universalism-p.html
  • Chris King | June 11, 2006 at 12:14 AM
    그렇다면 당신은 또한 내가 단서를 얻은, 교회의 입장에 대한 Keith의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가 실제로 말한 것에 내 자신의 해석을 추가하는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요. 흠… 어쨌든 기독교에는 개신교, 로마 가톨릭 및 동방 정교회의 대다수가 어떤 믿음을 확언한다면 이것이 기독교 전통의 “큰”부분을 구성한다고 말하는 정족수 규칙이나 무언가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약간 어리석고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 기독교 역사학자)은 아니지만, 아마 당신은 보편구원론이 교회사에서 소수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합의된 견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Keith DeRose | June 11, 2006 at 01:33 AM
    저는 “보편구원론이 교회사에서 소수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확실히 동의합니다 – 그리고 그것은 저를 곤란하게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신학자들을 따른다는 사실에 힘을 얻습니다.

    보편구원론에 대해 “칼빈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뒤집힌 것”이라는 말에 대해: 저는 칼빈주의자로 자랐고(대학 시절 내내 칼빈주의 학교(칼빈대학교Calvin College)를 다녔습니다), 실제로 저는 종종 그런 식으로 느끼기도 합니다. 만약 당신이 신적 결정론자이고(칼빈주의에서 비롯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디모데전서 2:4에서 비롯된), 적어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덧붙여서, 딤전 2:4은 칼빈에게 가장 잘 맞는 구절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신적 결정론을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개개인이 구원받는 이유에 대한 설명에서 하나님이 주연을 맡으실 것을 다른 유형의 기독교인들보다 더 많이 기대할 정도로 제 안에 충분한 칼빈주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딤전 2:4을 더하면 개인이 결국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 Kevin Corcoran | June 12, 2006 at 07:57 AM
    맞아요. 저는 B & C의 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 … 예를 들어, 저는 하나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실현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자 이시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얻으신다는 것). 그리고 저는 하나님의 목적 중에는 인간이 번영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인간이 영원히 지옥에서 불타거나 또는 단순히 모든 기쁨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영원히 분리되어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번영할 수 있을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저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강한 끌림을 경험하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제 생각에 다른 대안은 우리처럼 연약하고 유한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을 궁극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방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은 개혁적 성향을 가진 제 목구멍으로 순조롭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 Kevin Timpe | June 12, 2006 at 06:58 PM
    “보편구원론은 ‘칼빈주의가 올바른 방향으로 뒤집힌 것’이라는 주장”에 응답하자면, 최근에 결정론이 진리라고(또는 진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많은 유신론 철학자들이 보편구원론의 진리도 주장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린 베이커(Lynne Baker)와 더크 페레붐(Derk Pereboom)이 좋은 예입니다(물론 저도 수많은 반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보편구원론을 지지하지 않는 다른 똑같이 그럴듯한 방법으로 딤전 2:4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학적 결정론자라면 보편구원론자가 될 것입니다.
  • David Congdon | June 13, 2006 at 07:47 PM
    Keith DeRose, 글 감사합니다. 저는 당신의 웹 사이트와 최근의 글들을 읽기 전에 이미 보편구원론자였지만, 당신이 말한 내용들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현재 제 사이트(fireandrose.blogspot.com)에서 보편구원론에 대한 저의 신학적 논증(바르트, 융겔 등)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여러분의 의견과 GOTT의 다른 독자들의 의견을 환영합니다.

    “칼빈주의가 올바른 쪽으로 뒤집힌 것”과 관련하여, 저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신적 결정론을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가 성경적이고 기독교 중심적인 방식으로, 따라서 모든 피조물의 통제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제적 활동의 특별하고 구체적인 역사에 뿌리를 둔 방식으로 이러한 주장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Jamie | June 23, 2006 at 08:49 PM
    반드시 확신할 필요 없이 “그것이 참이기를 희망”하는 보편구원론자들에 관해서는, 위르겐 몰트만이 아마도 그 범주에 들어맞을 것이고 (그가 애초에 범주에 맞춰질 수 있다면!) 읽을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특히 『희망의 신학』을 읽어 보세요. 그의 종말론은 특정 장에 국한되지 않고 책 전체에 걸쳐 짜여져 있기 때문에 깔끔한 공식을 기대하지는 마세요.

    지난 몇 년 동안의 신학 여정 중 일부가 저를 보편구원론의 길로 이끌었기 때문에 저는 이 논의의 많은 부분에 공감을 느꼈습니다. 만약 제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영원한 고통’에 대한 주장 때문에 서명할 수 없는 교리 선언문이 많이 있습니다.(현재 다니는 교회의 교리 선언문 포함)

    그러나 저는 제 입장을 공식화하지 않았고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왜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까요? ‘누가 들어가고 누가 나가고’에 대한 세부 사항을 정리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의 결과를 희망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동안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사업을 계속합시다.
  • Keith | June 26, 2006 at 10:47 AM
    Re : 위의 마지막 문단
    저는 그러한 문제, 특히 많은”구도자”들에게 큰 관심을 끄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는 사업의 일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 Rógvi Jacobsen | July 22, 2006 at 07:48 PM
    저는 동물과 다른 존재들, 마귀까지도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로마서 8:18-23
    “제 생각에는 현재 우리가 겪고있는 모든 고통은 우리를 위해 드러나도록 예정된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드러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게 고난이 부과된 것은 그 자체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 고난을 부과하신 분의 목적, 즉 피조물 전체가 썩음의 노예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과 같은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까지 모든 피조물이 힘든 노동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령의 첫 열매를 맺은 우리도 우리 몸이 해방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내면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 성서).Rógvi
  • Robert prather | August 18, 2007 at 08:42 AM
    (마 7:13 KJVR)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넓어 거기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마 7:14 KJVR)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좁아 그것을 찾는 자가 적으니라. (마 15:9 KJVR)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마 7:7 KJVR) 그러나 그들이 사람들의 명령들을 교리로 가르치며 내게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막 7.8 KJVR) 너희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단지나 잔을 씻는 것과 같은 사람들의 전통을 지키며 또 그와 같은 일들을 많이 행하느니라.
    (막 7:9 KJVR) 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명령을 철저히 잘 저버리는도다.


    이것은 오늘날의 제도권 교회에도 여전히 적용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멀리 흩어 버리시는 또 다른 바벨탑처럼 보입니다.

    (창 11:4 KJVR) 또 이르되, 자,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도시와 탑을 세우고 탑의 꼭대기를 하늘에까지 닿게 하며 우리가 우리를 위하여 이름을 내고 이로써 온 지면에 널리 흩어짐을 면하자, 하더라.
    (창 11:5 KJVR) {주}께서 사람들의 자녀들이 세우는 도시와 탑을 보려고 내려오시니라.
    (창 11:6 KJVR) {주}께서 이르시되, 보라, 백성이 하나요, 또 그들이 다 한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이 상상하여 하고자 하는 어떤 일도 막지 못하리라.
    (창 11:7 KJVR)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창 11:8 KJVR) 이처럼 {주}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널리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 세우기를 그쳤더라.


    군중을 따라가는 것은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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