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이 항상 영원했던 것은 아니다! – George W. Sarris

출처: https://godslovewins.com/blog/hell-it-hasnt-always-been-forever/(2011/11/20)
원출처: https://georgesarris.blogspot.com/2011/05/hell-it-hasnt-always-been-forever.html(2011/5/1)

지옥이 항상 영원했던 것은 아니다!

George W. Sarris

복음주의 기독교계에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난 것일까요?

노스파크 대학교(North Park University)의 칼 올슨 종교학 교수인 스캇 맥나이트(Scot McKnight)는 최근 보편구원론, 또는 적어도 보편구원론에 대한 전망이 오늘날 복음주의의 저류에 흐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슈라고 언급했습니다.1

랍 벨(Rob Bell)의 저서 『사랑이 이긴다』(Love Wins)에 대한 경이로운 수준의 관심은 이 같은 관찰을 확실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Amazon.com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3위에 올랐습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와 같은 종교 관련 정기 간행물뿐만 아니라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 월스트리트 저널(The Wall Street Journal), 유에스에이투데이(USAToday) 및 기타 여러 세속적 뉴스 매체에도 이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심지어 이 이야기는 타임(Time)지의 커버 스토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무시하던 주변적인 이슈가 갑자기 중심적인 논의의 주제가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벨의 책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로 그분의 창조세계 전체의 회복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습니다.

안타깝게도 지금까지의 논의는 대체로 열기는 뜨거웠지만 제대로 조명된 내용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반응은 인신공격성 발언이 주를 이루었고, 많은 잘못된 정보가 생산되고 유포되었습니다. 특히 잘못된 정보로 인해 피해를 입은 분야는 역사입니다. 여러 리뷰와 기사들은 일반적으로 모든 것의 궁극적인 회복에 대한 생각은 소수의 고대 “이단자들”만이 가졌던 믿음이며, 일반적으로 오리겐(Origen)이라는 논란이 있는 인물로부터 시작된다고 가정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리겐은 기독교 교회 초기에 가장 유명했거나 처음 등장한 “보편구원론자”가 아니었으며, 그의 믿음은 그와 몇몇 고립된 추종자들만이 가졌던 소수의 견해가 아니었습니다. 19세기 목회자이자 신학자인 (그리고 라이먼 비처의 아들이자 해리엇 비처 스토우의 형제이며 한때 보스턴 파크 스트리트 교회의 목사였던) 에드워드 비처(Edward Beecher, 1803-1895)에 따르면, 고대 교회의 6개 신학 학파 중 4개 학파는 어떤 형태의 궁극적 회복을 지지한 반면, 단 하나의 학파만이 끝없는 형벌을 지지했습니다.2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사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고대 세계 사람들의 관심사도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 그리고 자신들이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인가, 아니면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처럼 제한된 능력을 가진 분인가? 그분은 사랑이 많으신 분인가, 아니면 그들의 신들처럼 변덕스러운 성품을 가지신 분인가? 인류의 최종 운명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믿음을 처음으로 명확히 표현한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 중 한 명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ia)였습니다. 클레멘트는 서기 150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난 그리스인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 문학의 모든 분야와 당시 존재하던 모든 철학 체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또한 구약 성경을 잘 알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는 이교도들에게는 기독교가 지적으로 존경받을 만하고 철학적으로 엄격하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에게는 기독교가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주권적 능력에 대한 클레멘트의 깊은 믿음은 영원에 대한 그의 이해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피조물의 일부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돌보시며, 모두를 구원할 능력과 의지가 있으십니다. 그에게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고 믿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함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원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 역시 상상할 수 없었는데, 그것은 선한 존재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주인이시며 우주의 구원을 바라보시고 모든 것을 준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돌보지 않으신다면 그것은 그분이 능력이 없으시거나(이는 약함의 증명이 될 것이므로 고려할 것이 아니다), 아니면 그분이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일 것인데, 이는 선한 존재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고통받을 수 있는 육신을 취하신 그분은 사치스럽게 게으르지 않으시다. 또한 그분은 모든 사람을 돌보시는데, 이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 되신 그분께 합당한 일이다. 그분은 구세주이시니, 누구에게는 구세주가 되시고 누구에게는 구세주가 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니다. … 모든 것은 일반적으로나 특별히 우주의 주님에 의해 우주의 구원을 목적으로 준비되어 있기 때문이다…3

클레멘트에게 하나님의 형벌은 치료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며,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의 궁극적인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을까요? 클레멘트는 “아니다”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이생에서뿐만 아니라 우리가 육신을 떠난 후에도 계속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활동적인 능력이 “어디에나 있으며 항상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형벌은 구원이자 훈육이며, 회심에 이르게 하고, 죄인의 죽음보다 회개를 선택하게 하는데, 이는 특히 정욕으로 어두워진 영혼이 육신에서 풀려나면 더 이상 미천한 육신에 방해받지 않고 더 분명하게 지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주님은 능력이 있으시며, 이곳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그분께로 향하는 모든 이들에게 의로움과 평등함으로 구원하신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활동적인 능력은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나 있으며 항상 역사하고 있기 때문이다.4

클레멘트에게 하나님의 주권적 능력은 모든 사람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과 결합하여 궁극적으로 그분이 모든 사람의 회복을 가져올 수 있게 합니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

니사의 그레고리는 그의 형제인 대 바실(Basil the Great), 절친한 친구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와 함께 AD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가르침이 승리하여 마침내 니케아 신조가 형성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가 처음에 공의회 의장을 맡았고, 니사의 그레고리는 신조에 “나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을 믿는다”는 조항을 추가했습니다.

니사의 그레고리는 서기 395년경에 사망했으며, 동방 교회 교부 중 가장 위대한 교부 중 한 명으로 여전히 존경받고 있습니다. AD 787년, 제7차 공의회는 그레고리에게 “교부 중의 교부”(Father of the Fathers)라는 이름을 붙여 그를 기렸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회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로서의 그의 자격에 의문이 제기된 적은 없으며, 회복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단 한 번도 정죄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끔찍한 고통으로 영원히 형벌을 내리실까요? 그레고리는 미성숙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두려워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피하려는 동기를 갖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성숙한 사람들은 사후 형벌의 진정한 목적, 즉 선하신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건강하게 회복시키기 위해 정하신 치료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숙련된 의사가 자신의 일을 마칠 때까지 멈추지 않듯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영혼이 이생에서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면 오는 생에서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영혼이 치유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면 이후의 삶에서 치료가 이루어진다. 이제 육체의 질병에는 여러 가지 차이가 있으며, 일부는 더 쉬운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고 다른 일부는 더 어려운 치료가 필요하다. … 영혼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미래의 심판은 같은 종류의 일을 예고하는데, 이것은 생각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고통스러운 보복에 대한 두려움을 통해 악을 피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끔찍한 교정의 위협으로 여겨지는 반면, 좀 더 지성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독특한 피조물인 사람을 본래의 상태의 은혜로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치료 과정으로 여겨진다.5

그레고리는 고린도전서 15장 28절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 안의 모든 것”(all in all)이 되실 것이라고 말한 구절을 설교하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설명했습니다. 결국 악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창조물을 회복시키려는 그분의 목표를 성공시키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에서 신성한 사도가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묻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때가 되면 악은 비존재로 넘어갈 것이며, 존재의 영역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신성하고 무결한 선은 모든 이성적 본성을 그 자체로 포괄할 것이며, 하느님이 창조하신 그 어떤 존재도 하느님 나라를 성취하는 데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모든 것 속에 존재하는 악은 정화하는 불꽃에 녹아내린 비금속처럼 소멸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악이 섞이기 전의 태초의 상태처럼 될 것입니다.6

현대의 학자 존 R. 삭스(John R. Sachs)는 초대 교회 교부들의 회복에 대한 믿음에 대한 그의 연구의 결론으로 다음과 같은 관찰을 제시합니다.

… 우리는 오리겐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에 대한 중대한 이유들을 제시하는 데 있어서 혼자가 아니었음을 보았다. 그 이전에는 클레멘트, 이후에는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와 니사의 그레고리도 같은 방향으로 주장했다. 이들 중 누구도 정죄를 받지 않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며, 실제로 이들은 여전히 높은 존경을 받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 각자는 때때로 종말론적 형벌에 대해 다소 전통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에게 진정한 동기를 부여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부활을 통해 계시되고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의 무한성과 불가해성에 대한 더욱 강한 확신이었다. 이 신학자들은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희망을 당시의 철학적 흐름이 아닌 바로 거기에서 발견했다. 따라서 이들의 사상은 어떤 역동적인 긴장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인간의 자유를 서로 대립하는 동등한 힘으로 보는 추상적이고 중립적인 긴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와 보편적인 구원 의지라는 확실한 무게 중심을 가진 긴장이다.7

하나님께서 언젠가 그분의 모든 창조물을 처음의 완전함으로 회복시킬 것이라는 믿음은 옳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 교회 역사상 존경받는 지도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http://www.questia.com/read/5000239554?title=Apocatastasis in Patristic Theology

  1. https://relevantmagazine.com/faith/universalism-and-doctrine-rob-bell/ (역주: 링크 수정) ↩︎
  2. Edward Beecher, History of Opinions on the Spiritual Doctrine of Retribution, D. Appleton and Company, New York, 1878, p. 189ff ↩︎
  3.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VII, Chapter 2, http://www.ccel.org/ccel/schaff/anf02.vi.iv.vii.ii.html ↩︎
  4.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Book VI, chapter 6 http://www.ccel.org/ccel/schaff/anf02.vi.iv.vi.vi.html ↩︎
  5. Gregory of Nyssa, Catechetical Oration, VIII, Christian Classics Ethereal Library, Calvin College, http://www.ccel.org/ccel/schaff/npnf205.xi.ii.x.html ↩︎
  6. Gregory of Nyssa, Sermon I Corinthians 15:28, Documents in Early Christian Thought, Editors by Maurice Wiles & Mark Sant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p. 257 ↩︎
  7. John R.Sachs, “Apocatastasis in Patristic Theology.” Theological Studies. Volume: 54. Issue: 4. 1993. pp. 617+, ↩︎

11 thoughts on “지옥이 항상 영원했던 것은 아니다! – George W. Sar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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