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MercyOnAll
원출처: Thomas Talbott 교수의 홈페이지 (PDF 버전)
지옥에 대한 자유의지 신정론(Free-Will Theodicies Of Hell)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t)
2016년 가을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지옥을 종말론적 형벌의 한 형태로서, 세상을 사는 동안 자유롭게 저지른 죄에 대해 내려지는 신성한 보복으로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특히 20세기에 들어서 일부 기독교 사상가들은 ‘신성하게 내려지는 보복’이라는 생각을 ‘자유롭게 받아들인 상태’라는 생각으로 대체하면서 이러한 전통적인 이해를 수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이해의 초기 지지자 중 한 명인 C. S. 루이스는 이렇게 썼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창조할 때, 처음부터 전능자는 … 패배….의 가능성을 감수한다. 나는 저주받은 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결국 성공한 반역자이며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기꺼이 믿는다.”1 이 견해는 분명히 인간의 자유에 대한 양립불가능론적(incompatibilist)(또는 소위 자유의지론적(libertarian)) 이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에 따르면 전능함조차도 우리의 자유로운 선택을 직접적으로든 또는 이차적 원인을 통한 간접적 방식으로든 인과적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참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를 창조하는 것은 그러한 존재 중 일부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에 대해 가진 사랑의 목적을 영원히 무너뜨릴 수도 있는 내재적 위험을 안고 있다고 루이스는 믿었습니다.
자유로운 선택의 논리적 한계(The Logical Limits of Free Choice)
그러나 누군가가 한편으로는 지옥의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지옥의 문을 안에서부터 잠그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유로운 선택의 가능한 범위에는 어떤 종류의 한계도 없는 것일까요? 만약 그런 한계가 없다면, 결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선택은 순전한 우연이나 완전한 무작위와 구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만약 그런 한계가 있다면 우리는 루이스가 상상한 선택이 그 한계 내에 있는지 아니면 한계 밖에 있는지를 고려해 봐야 합니다. 더욱이 후자의 문제를 고려하는 데에는 단순히 양립불가능론을 주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도덕적 자유에 대한 훨씬 더 완전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도덕적 자유의 필수 조건 중 하나(즉, 선택이 선택 주체가 통제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인과적으로 결정되지 않는 경우에만 적절한 의미에서 자유롭다는 조건)만을 명시한 다음, 자유로운 선택의 다른 필수 조건은 없는 듯이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저 원인이 없는 사건이거나, 단순히 주체가 인과적으로 일으킨 어떤 선택, 또는 단순히 여러 선택지들 사이에서 무작위로 이루어진 선택에 불과한 것들은 그것을 선택한 주체가 도덕적으로 책임져야 하는 자유로운 선택으로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도덕적 자유는 적어도 최소한의 합리성(rationality)을 필요로 하는데, 여기에는 예를 들어 행위의 일반적인 이유들(reasons)을 분별하고, 경험으로부터 합리적인 추론(reasonable inferences)을 끌어내며, 자신의 행위의 결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는 능력 등이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린아이, 심각한 뇌 손상자, 편집증적 조현병 환자, 그리고 심지어 개를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의 범주에서 제외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 중 일부가 인과적으로 결정되지는 않았을지라도, 우리 대부분은 이들이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의 자격을 갖추는 데 필수적인 합리성의 일부를 결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조현병에 걸린 한 청년이 그를 사랑하는 그의 어머니를 자신의 친어머니를 잡아먹은 사악한 외계인이라고 믿고 살해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가령, 부분적으로 다른 사악한 외계인의 보복이 두렵다는 이유에서) 명백히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었던 상황에서 그렇게 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처럼 비합리적인 선택이, 심지어 인과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엄격한 결정론에 따른 선택보다 진정한 도덕적 자유와 더 잘 양립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심각한 망상적 믿음, 특히 우리 삶에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망상적 믿음은 원칙적으로 그것에 반하는 어느 정도 강력한 증거에 의해 교정될 수 있거나, 아니면 그러한 착각에 근거한 선택은 너무 비이성적이어서 자유로운 도덕적 선택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유쾌한 동료인 제리 월즈(Jerry Walls)는 적어도 어떤 망상은 스스로 만들어낸 자기기만의 산물이거나 그 자체로 자유롭게 저지른 죄의 결과라고 말합니다. 어떤 대목에서 그는 한 편에 있는 저의 보편구원론과 다른 한 편에 있는 그의 지옥에 대한 자유의지 신정론 사이에 “머리카락 굵기” 정도의 차이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암시하는 것 같고, 저는 이에 대해 매우 강하게 동의합니다.2 그리고 이 머리카락 굵기의 차이에 대해 생각해 보니, 이 모든 것은 자기기만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자기기만] 개념을 어느 수준에서든 명확하게 이해하는 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개념의 정확한 분석이 무엇이든, 자기기만의 존재 자체는 모든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제거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의 무지와 비합리성이 기존에 이미 있었음을 함축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조건에서 그러한 기존의 무지와 비합리성이 진정한 도덕적 자유와 양립할 수 있을까요? 저는 다른 형태의 망상과 마찬가지로 자기기만도 그것이 완전히 병리적이지는 않을 때, 즉 행위자가 진정한 도덕적 자유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할 때, 그리고 따라서 자기기만이 원칙적으로 교정 가능한 상태일 때만 도덕적 자유와 양립할 수 있다고 제안합니다. 예를 들어, 만약 제가 위험한 경사면을 스키를 타고 내려갈 수 있는 기술이 있다고 스스로 속이고, 동시에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면, 조만간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지거나 반복적으로 넘어지는 것을 통해 저의 환상은 산산이 부서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모든 암묵적인 경험으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하나님과의 연합보다 더 바람직하다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실제로 하나님과의 진정한 분리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지 전혀 모를 수 있습니다. 루이스 자신이 말했듯이, 신성한 “본성과의 연합”은 “지극한 행복이고 그것으로부터의 분리는 [객관적으로] 끔찍한 것”이며, 이것이 그가 올바르게 선언했듯이 정확히 “천국과 지옥이 하는 역할”입니다.3 이제 월스는 지속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사람, 즉 죄에 너무 깊이 빠져서 완전히 자기 자신에 매몰된 사람은 하나님과의 연합이 주는 지극한 행복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설득력 있게 주장합니다. 우리가 이 점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머리카락 굵기의 차이”는 결국 어디에 있을까요? 아마도 바로 여기일 것입니다. 저는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로서 자격을 갖출 정도로 이성적인 사람이 슬피 울고 이를 가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의 하나님과의 분리라는 끔찍한 경험을 하면서 동시에 계속해서 그런 상태를 결국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만, 월스는 이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는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상태가 아무리 끔찍할지라도 그것을 하나님께 결국 복종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며 영원히 계속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의견 대립에서 제가 가진 입장을 조지 맥도날드보다 더 강력하게 표현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거의 생각하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그와 함께 계시면서, 그[의 존재]를 지탱해 주시고, 따뜻하게 해주시고, 기쁘게 해주시고, 가르쳐 주십니다—말하자면, 그에게 삶을 좋은 것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 사람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그 사람 자신을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존재를 멈추게 하지는 않는 선에서 최대한 그 사람에게서부터 물러나시는 때 [또는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물러나는 때], 그 사람이 그의 존재의 심연 바로 앞에서 끊임없이 존재의 혼란을 겪으면서, 어떤 도움도, 피난처도, 목표나 목적도 없이, …… 기쁨을 불어넣어 주는 어떤 것도, [가장 희미한 사랑의 경험을 포함하여] 삶을 좋게 만들어 주는 어떤 것도 없이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그때 그는 고통 속에서 닫힌 문으로부터 들려오는 지극히 희미한 생명의 소리라도 들으려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그때, …… 그는 다시 한번 생명을 알기 위해, 이 고통스러운 부정의 공포, 이루 말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를 그 희망적인 고통의 영역으로 바꾸기 위해 그 소멸하는 불의 한가운데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존재하는 것—그 하나의 살아 있는 죽음—의 공포는 우리가 상상력으로 그려낼 수 있는 어떤 것보다도 큽니다.4
“그 희망적인 고통의 영역”이라는 표현에 주목하세요. 맥도널드는 여러 망상과 자기기만 때문에 바깥 어둠 속에 던져진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연합의 행복을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월스의 말에 동의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맥도널드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버스를 타고 천국의 언덕으로 가는 것이 극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이라는, 루이스가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에서 그린 그림을 분명히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사실 루이스는 아마도 자신의 스승으로 여겼던 맥도널드로부터 바로 이런 생각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루이스와 맥도널드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머리카락 굵기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월즈와 저 사이의 머리카락 굵기 차이와 유사합니다. 맥도널드와 저는 하나님에 대한 암묵적 경험조차 없는 삶은 너무 끔찍해서 누구도 영원히 그런 삶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는 없다고 보는 반면, 루이스와 월스는 그것이 사실 그 정도로 끔찍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러한 완전히 끔찍한 분리의 상태로부터 보호하시고, 그것도 죄인들이 계속해서 그러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지켜주기 위해 그렇게 하신다면, 그 결과는 전통에서 말하는 것만큼 끔찍하지는 않은 상태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지옥에 대한 자유의지 신정론과 달리 보편구원론은 게헨나, 불못, 바깥 어두운 곳과 관련된 신약성경의 이미지에 물타기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도 주목하십시오. 예를 들어 바깥 어두운 곳이 소멸에 이르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논리적 한계를 나타낸다면, 그리고 루이스의 주장대로 그러한 분리가 실제로 객관적으로 끔찍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왜 아무도 이 객관적인 끔찍함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영원히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또한 하나님과 분리된 삶이 바람직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모든 환상과 자기기만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깨뜨리실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키려는 우리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든 방해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실 수 있는지도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그 자유를 행사할 때, 그리고 우리가 스스로 혼란스럽게 선택한 바로 그 삶을 경험하도록 하나님께서 허용하실 때, 우리는 그 끔찍한 본질을 경험하고 마침내 발견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을 만큼 이성적인 (정상적인 신경계를 가진) 사람이 무방비 상태의 팔을 뜨거운 불 속에 밀어 넣으면서도 그것이 강렬한 쾌감을 유발한다는 망상을 유지할 수 없듯이, 그런 사람이 바깥 어두운 곳을 경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과 같은 다른 상태가 그것보다 더 나쁠 것이라는 망상을 유지할 수도 없습니다.
이 문제를 보여주는 예로, 존 밀턴이 묘사한 사탄이 “천국에서 섬기는 것보다 지옥에서 통치하는 것이 낫다”5라고 반항적으로 외치는 장면을 생각해 보세요. 괄호를 치고 묻고 싶은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지옥에서 통치할 수 있다는 신화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요? 이것은 성경 자체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어쨌든 사탄이 하나님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는 맥락은 그가 아직도 스스로 만들어낸 망상, 즉 “지옥의 천국을 만들 수 있다”는 망상, 지옥에서는 (파괴적인 욕망의 속박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자유롭다는 망상, 그리고 지옥에서는 “안전하게 통치할 수 있다”는 망상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상황임이 분명합니다.6 그러나 그가 여기서 상상하는 것은 바깥 어두운 곳의 현실, 즉 통치할 대상도 없고 경험할 수 있는 어떤 물리적 환경도 없는 완전한 허무 속에 홀로 매달려 있는 영혼의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7 이보다 더 무지하고 망상적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밀턴의 작품에 대한 경의를 표하자면, 제4권에서 사탄은 이미 제1권의 “영웅적인” 연설을 가능하게 했던 망상을 대부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제4권의 더 불쌍한 (심지어 인간적인) 인물은 실제 회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회개에 이르는 길로 잘 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8 그리고 그의 최후의 회개 거부는 그가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기에는 너무 비이성적인 맥락에서 발생합니다. 그의 말을 들어보세요:
그러니 희망이여 안녕, 그리고 희망과 함께 두려움도 안녕,
후회도 안녕: 나에게 좋은 모든 것을 잃었네;
악이 나의 선이 되리라 …
이것은 마치 정상적인 신경계를 가진 인간이 타오르는 뜨거운 불에 손을 밀어 넣고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이 나의 강렬한 즐거움이 되리라!”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보다 더 비이성적일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지옥을 신성한 보복의 한 형태로 보는 전통주의자들은 지금까지 제가 말한 것을 거부할 필요가 없다는 것에 유의하십시오. 왜냐하면 제가 처음에 지적했듯이, 그들은 애초부터 지옥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상태가 아닌 외부에서 부과된 형벌, 즉 과거에 자유롭게 저지른 죄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저주받은 자들이 지옥에서 견딜 수 없는 비참함을 겪으면서도 결코 지옥을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유에 대한 수정된 자유의지론적 설명
저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 확신을 가진 자유의지론자입니다. 다른 자유의지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저는 신이 직접적으로 또는 이차적 원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인과적으로 결정하는 창조세계에서는 도덕적 자유나 도덕적 책임(심지어는 독립적 합리성까지도)이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신이 모든 일을 결정한다면,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주체는 단 하나뿐일 것이고, 그것은 바로 신 자신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결정론은 모든 가치 있는 창조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서 우리는 물리적 우주의 단순한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유로운 행동은 외부의 충분한 원인(그것이 우리가 태어나기 전의 먼 과거에 있든, 영원에 있든)의 산물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자유의지론적 통찰이며, 저에게는 우리의 현재 행위들 중 어떤 것이든 그런 식으로 결정되어 있다고는 전혀 믿기 어렵습니다. 비록 그중 일부가 보다 직접적인 믿음, 욕구, 성격적 특성에 의해 결정될 수는 있겠지만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애매함, 무지, 오해의 맥락에서 태어나 선택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비결정론은 도덕적 자유를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과거와의 단절을 제공하고, 우리가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스스로 발견하는 독립적인 행위자로 등장하도록 함으로써 우리의 선택(또는 유사-선택)에 큰 역할을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저는 비결정론이 하나님의 창조를 가치 있게 만드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할까요? 어느 정도든 비결정론은 피조물의 숙고와 선택 과정에 우연이나 무작위성, 심지어 비합리성의 요소까지도 개입시키지 않을까요?9 그리고 순전한 우연이나 무작위성은 결정론만큼이나 진정한 자유로운 선택과 양립할 수 없지 않을까요?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자유의지가 결정론과 비결정론 모두와 양립할 수 없다면,10 자유의지에 대한 일관된 설명의 여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매우 중요한 점을 깨닫는다면 이 수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독립적인 이성적 존재로, 따라서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출현하는 데 필수적인 바로 그 조건들, 즉 애매성, 무지, 그리고 요구되는 비결정론은 그 자체로는 완전한 자유와 도덕적 책임을 방해하는 장애물입니다. 그것들은 우리가 발달 단계의 도덕적 행위자로 출현하고 환경과 상호작용하고 우리 자신의 행복의 조건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우기 시작한 후에야 하나님께서 점차적으로 해결해 주실 수 있는 장애물들입니다.
예를 들어, 단순한 무지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충분하고 완전한 지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그 지식은 전혀 개인적인 발견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설을 세우고, 그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시험한 다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왜 하나님과의 연합이 행복이고 그분과의 분리가 객관적으로 끔찍한 것인지 스스로 터득하는 복잡한 학습 과정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고, 선택의 결과를 경험한 다음, 이러한 결과를 통해 왜 사랑과 용서가 이기심과 단절보다 나은지 배우는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여기에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의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는 적어도 한동안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는 상황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자유의지 유신론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무지는 우리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자유를 완전히 실현하는 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누군가 지역 상수도에 LSD를 섞어 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내가 아무리 자유롭게 물을 마시기로 선택했더라도 LSD를 섭취하기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감추어짐(divine hiddenness)에 대한 자유의지 유신론자의 이해도 이와 유사합니다. 주어진 상황의 모호함, 무지, 오해가 하나님을 우리에게서 숨기거나 적어도 불신앙을 합리적인 선택으로 만드는 한,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은 우리가 도덕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자유로운 선택이기보다는 어둠 속에서 맹목적으로 뛰어드는 것과 비슷해집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감추어짐(God’s hiddenness)은 우리에게 참된 본성과 존재 자체가 숨겨져 있는 분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더 크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11
이제 무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자유의 조건이자 장애물인 것처럼 비결정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제가 제안하는 해결책은 우리가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등장할 때 비결정론이 하는 역할과 우리가 결정되지 않은 선택의 결과로부터 중요한 도덕적 교훈을 배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게 된 이후에 비결정론이 하는 역할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선택이 충분한 원인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도덕적 선택을 시작하는 것은 우리의 도덕적 자유에 필수적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선택이 완전히 결정되었다면, 그것은 대부분 새롭게 등장하는 행위자의 외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실수로부터 배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것 또한 도덕적 자유에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도덕적 교훈을—특별히 나쁜 선택[의 결과]로부터—배우기 시작하면, 우리의 가장 자유로운 선택 중 일부는, 최선의 행동 방식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이성적 판단이 주어진다면 더는 심리적으로 다른 선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자발적인 선택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성적 판단 능력으로 주어진 증거를 합리적으로 평가할 수 있게 되어, 최선의 행동 방식에 대한 우리 자신의 합리적 판단으로 다른 방식이 아닌 이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할 때, 자유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는 심리적 가능성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에 반하는 행동은 우리에게 안전하지도 않고 우리에게 열려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나는 내 입장을 고수한다. 나는 다른 것은 할 수 없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12 루터의 입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다음과 같은 가장 중요한 점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는 것은 의지가 다른 것이 아닌 최선의 행동 방식에 관한 자신의 판단에 속박되어 있는 사람의 선언이며, 더 나아가 루터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기로 완전히 결심하고 나서 더이상 자신을 되돌려 다른 선택을 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해진 바로 그 순간에 자유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최선의 행동 방식에 대한 자신의 합리적 판단이 행동을 결정할 때 우리는 가장 자유롭기 때문에, 루터의 철회 거부는 자유로운 행동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유, 필연성, 그리고 올바른 종류의 강제력
이제 지옥에 대한 자유의지 신정론을 고수했던 C. S. 루이스가 자신의 기독교 개종을 어떻게 묘사했는지 생각해 봅시다:
나는 굴복하고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아마도 그날 밤, 영국 전역에서 가장 낙담하고 마지못한 개종자… 발로 차고, 발버둥 치고, 분개하고, 사방으로 눈을 돌리며 탈출의 기회를 노리다가 끌려온 탕자. 안으로 들어오라고 강요하는 말은 악한 사람들에 의해 너무 많이 남용되어 우리를 몸서리치게 하지만,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신성한 자비의 깊이를 드러내는 말이다. … 그분의 강제는 우리에게는 해방이다.13
이 인용문에서 보여주듯이,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과 관련된 자신의 자유를 저주와 관련된 잃어버린 자의 자유를 묘사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게 묘사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이 인용된 맥락에서 그가 얼마나 신중하게 자신의 표현을 선택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내게 다가오시기 전에 나는 사실 지금 보기에는 전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의 순간을 제공받았다”는 것을 관찰했습니다.14 그러나 그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즉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내가 선택했다’고 말하지만, 그 반대로 하는 것은 정말로 불가능해 보였다. … 당신은 내가 자유로운 행위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나는 이것이 내가 해왔던 대부분의 행위보다 완벽하게 자유로운 행위에 가까웠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필연성은 자유와 반대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15 그러니까 여기서 그는 마치 양립가능론자처럼 개종이라는 결정적인 선택이 자발적인 것이었지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 자유롭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심지어 하나님이 그의 자발적인 복종을 강제하신(compel) 것처럼, 그리고 그러한 강제가 그가 자유롭게 복종한 것과 잘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루이스는 하나님께 복종하는 자신의 행위가 강제에 의한 것이면서 동시에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라고 (제가 생각하기로는 올바르게) 주장했을까요? 저는 이에 대한 답으로 두 가지 종류의 강제, 즉 설득력 있는 증거에 근거한 올바른 종류의 강제와 전혀 증거와 무관한 잘못된 종류의 강제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합니다. “설득력 있는 증거”란 (대략적으로) (인지 능력이 제대로 작동한다는 전제하에) 어떤 믿음을 정당화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어진 믿음을 거부할 힘을 제거하는 증거를 의미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당신을 자신의 종교로 개종시키기 위해 고문을 한다면, 이는 루이스가 인간의 사악함에 기인한다고 말한 바로 그 종류의 잘못된 강제의 예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고통이 아무리 참을 수 없을 정도라고 해도, 그것은 그의 종교가 참된 종교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없으며, 그 종교가 참된 종교라는 설득력 있는 증거가 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강제는 심지어 당신이 개종한 척을 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종교를 거부하거나 적어도 종교에 대한 그의 해석을 거부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잘못된 종류의 강제인 이러한 고문과는 대조적으로, 제가 올바른 종류의 강제로 간주하는 예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당신이 불에 직접 닿을 때마다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면, 당신은 분명히 불이 화상을 입히고 그러한 통증을 유발한다는 강력한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불에 반복적으로 접촉해도 관련 믿음이 강제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이 문제에 대해 합리적인 행위자나 도덕적으로 자유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기에는 너무 비이성적일 것입니다. 따라서 믿을 자유는 믿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믿을 수 있는 심리적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며, 믿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무작위적인 요소를 요구하지도 않고, 강력한 증거를 거부할 수 있는 이성적 행위자의 힘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독립적인 이성적 판단과 증거가 적절하게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 있는 최소한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우리의 자유는 기독교인들이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받았다고 믿는 종류의 놀라운 계시로 그분께서 우리의 믿음을 바꾸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셔야 한다거나, 그분이 우리에게 영원히 감춰져 계셔야 한다거나, 그분이 우리의 환상을 깨뜨리고 우리의 무지를 제거하기 위해 우리가 완전히 납득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시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셔야 한다는 것을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의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특정한 믿음을 심어주셔서 우리 자신의 이성적 능력을 우회하는 것과는 분명히 양립할 수 없지만,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거부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증거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증거와 관련된 최선의 행동 방침에 대해 우리 자신의 독립적인 판단을 따를 수 있는 힘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 자신의 판단이 충분히 합리적이며 그에 대한 축적된 증거가 충분히 강력하다면, 우리는 다르게 행동할 심리적 가능성이 제거된 상황에서 실제로 가장 자유로운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의 힘으로 이해되는 이러한 자유는 결코 자기 자신을 부정하거나 자신의 가장 합리적인 판단에 반하는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루이스가 진정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 대한 복종이 모든 행동 중에서 가장 자유롭다고 주장했을 때 그가 옳았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가정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절대적 분리가 모든 사랑의 관계뿐만 아니라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인간 행복의 원천으로부터의 분리를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반대로 그분과의 연합이 행복이라면, 삶의 경험에서 그러한 현실에 대한 설득력 있는 증거를 얻을 수 있는 합리적 주체라면 루이스처럼 자유롭게 하나님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결론
지옥에 대한 자유의지 신정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주된 도전은 도덕적 자유에 대한 일관된 설명, 즉 누군가가 객관적으로 끔찍한 상황을 영원히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덕적 자유에 대한 일관된 설명에 대한 주요 도전은 결정론과 비결정론이 각각 도덕적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주장입니다. 이 명백한 역설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비결정론이 우리가 신과 구별되는 자유로운 도덕적 행위자로 출현하는 데 필수적인 조건인 동시에 완전한 자유와 도덕적 책임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최소한의 합리성이라는 조건을 더하면, 자유로운 도덕적 주체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이성적인 사람이 객관적인 공포를 영원히 자유롭게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이 죄와 반역에 빠져서 신성한 본성과의 연합의 행복을 경험할 수조차 없다고 하더라도, 신은 결국 신에게 자유롭게 복종하도록 보장할 수 있는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은 그들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을 존중하고 그들이 스스로 혼란스럽게 선택한 신성한 본성과의 분리라는 끔찍한 상황을 경험하도록 허용하기만 하면 됩니다.
- C. S. Lewis, Problem of Pain (New York: Macmillan, p. 127. (번역본: 이종태 역, 『고통의 문제』, 홍성사, 2018.) ↩︎
- “A Philosophical Critique of Talbott’s Universalism” in Universal Salvation? The Current Debate (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2003), p. 105 참조. ↩︎
- C. S. Lewis, Surprised by Joy (New York and London: Harcourt, Brace, Jovanovich, 1955), p. 232. (번역본: 강유나 역, 『예기치 못한 기쁨』, 홍성사, 2018.) ↩︎
- “The Consuming fire” in Unspoken Sermons (Whitethorn, CA: Yohannesen, 2004), p. 31.
(번역본: “소멸하는 불”, 『전하지 않은 설교』, 홍성사, 2020.) (역주: 인용문은 직접 번역) ↩︎ - Paradise Lost, Book I, line 263. ↩︎
- 251-261행 ↩︎
- 바울이 크레타 섬의 시인 에피메니데스를 인용하여 “그[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살고 움직이며 우리의 존재를 갖는다”(행 17:28)고 말했을 때, 이것은 제가 해석하기로는 하나님이 우리의 도덕적, 영적 환경일 뿐만 아니라 우리의 물리적 환경이기도 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물리적 질서에 대한 우리의 경험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암묵적인 경험이며, 따라서 바깥 어두운 곳에서의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는 물리적 환경에 대한 경험조차도 배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4권에서 도덕적 자유를 위해 필수적인 깨어난 양심은 사탄을 절망으로 이끌고(83행 참조), “교만과 더 나쁜 야망이 나를 무너뜨린”(40행) 정도를 인정하도록 이끕니다. 그는 심지어 “내가 전능자를 정복할 수 있다고 / 자랑했던”(86-87행) 어리석음을 자책하고 자신의 죄의 정도도 인정합니다: “아, 어째서! 그분[신]은 그런 결과를 받을 만하지 않다 / 그가 창조하신 나로부터 / 그 밝은 탁월함으로”(42-45행). 잠시 후 그는 한탄합니다: “비참한 나! 내가 어느 길로 날아가야 하나 / 무한한 분노와 무한한 절망? / 내가 날아가는 길은 지옥이고, 나 자신이 지옥이다”(73-75행). 그런 비참함 속에서도 아직 이성을 완전히 잃지 않았기에 그는 회개하는 것까지 생각해 봅니다: “오, 마침내 회개하라: 남아 있지 않은가 / 회개할 곳도, 용서받을 곳도?” (79-80행).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자신이 지옥의 타락한 천사 군단을 계속, 어쩌면 영원히 다스릴 수 있고 그 대가로 그들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을 수 있다는, 바깥 어두운 곳에서 쉽게 깨질 수 있는 망상을 여전히 품고 있습니다. 이러한 망상과 함께 자신이 속인 사람들 앞에서 수치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가 견디기에는 너무 커서 회개하지 않으려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
- 이런 취지의 훌륭한 논증은 Peter van Inwagen, ‘Free Will Remains a Mystery’, in Robert Kane, The Oxford Handbook on Free Will (Oxford: The Clarendon Press, 2001), pp. 158-177.을 참조하세요. ↩︎
- 예를 들어, Richard Double, The Non-reality of Free Will (New York &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참조. ↩︎
- 하나님의 감추심과 그 의미에 대한 훌륭한 논의로는 Michael L. Peterson and Raymond J. VanArrogon (eds.), Contemporary Debates in Philosophy of Religion (Malden: Blackwell Publishing Ltd., 2004) 2장(30-58)의 J.L. Schellenberg과 Paul K. Moser의 논쟁을 참조. ↩︎
- Henry Bettenson (ed.), Documents of the Christian Church, 2nd ed.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3), pp. 282-83. 강조 추가. ↩︎
- Lewis, Surprised by Joy, pp. 228-229. ↩︎
- Ibid., p. 224. ↩︎
- Ibi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