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기독교인 철학자이자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Keith DeRose의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글(“Universalism and the Bible”)을 번역한 글입니다. 1998년도 말에 온라인 상에 업로드 된 이후에 영어권의 보편구원론에 대한 논의에 큰 영향을 준 글입니다. 가령 『복음주의적 보편구원론자』(The Evangelical Universalist)의 저자인 Gregory MacDonald(가명, Robin Perry)는 그의 책 2판 서문에서 이 글을 통해 보편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옹호를 처음 접했다고 썼습니다. 또한 보편구원론 관련 책이나 온라인 상의 글들에서 자주 인용되거나 언급되는 글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Keith DeRose로부터 번역문 게시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
(12월 17일 수정: ‘보편주의’를 ‘보편구원론’으로 수정)
보편구원론과 성경
정말 좋은 소식(The Really Good News)
키쓰 드로즈(Keith DeRose)
(번역: https://christianuniversalism.kr/)
1. 보편구원론이란 무엇인가?
“보편구원론”이라는 말로 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지에 대해 처음부터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저는 “보편구원론”을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입장을 가리키는 의미로 말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하나님이 죽음 이후에 많은 사람들을 벌하실 것이라는 견해와 양립할 수 있으며, 일부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많은 보편구원론자들은 하나님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보편구원론은 그러한 형벌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보편구원론은 또한 일부 사람들이 (형벌을 받거나 받지 않은 후에) 소멸될 것이라는 견해와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는 점에서는 보편구원론과 일치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는 점에서 보편구원론과 다릅니다. 일부 보편구원론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동물에게도 적용하고 일부는 타락한 천사나 심지어 사탄에게도 적용하려고 하지만, 저는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요컨대, 보편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천국] 잔치에 참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입니다.
2.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몇몇 성경 구절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이해된 보편구원론은 신약성경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보편구원론과 반(反)보편구원론 중 어떤 것이 ‘성경의 입장’인지 선택해야만 한다면, 보편구원론이 꽤나 분명한 승자일 것이라고 선택할 정도로 그 지지가 강력하다고 판단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고, 지금은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세 개의 성경 구절을 소개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 For as in Adam all die, so also in Christ shall all be made alive.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새번역)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개역개정)
“모든”(all)에 주목하세요.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혹자는 어떤 사람들은 심판을 받고 영원히 고문을 당하기 위해 살아날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히 이 구절의 주변 문맥을 읽고 이러한 구절이 일반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된 후에는 받아들이기 매우 어려운 해석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난”(made alive) 사람들은 곧 “구원받은”(saved) 사람들이라는 것은 매우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은, 이런 일이 누구에게 일어날까요? 이 구절의 대답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사람! 그리스어와 영어 번역본에 모두 적용되는 문법의 요점이 있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의 문법적 기능은 “모두”를 한정하거나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삶을 얻으리라”(“…so also shall all who are in Christ be made alive.”)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했다면 저는 이 구절에 그렇게 환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는 동사 “얻으리라” 또는 전체 절인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를 수식하는 부사구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이 마지막 요점은 아래 6장에서 중요하게 다룰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9-20절 19For in him [Christ] all the fullness of God was pleased to dwell, 20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all things, whether on earth or in heaven, making peace by the blood of his cross. 19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안에 모든 충만함을 머무르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20그분의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분으로 말미암아 만물을,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자기와 기꺼이 화해시켰습니다. (새번역) 19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개역개정)
“모든”(만물, all)에 다시 주목하세요. 누군가가 지옥에서 불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영원한 형벌을 받거나 단순히 소멸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결코 화목되지 못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이 구절이 거짓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로마서 5장 18절 18Then as one man’s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men, so 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acquittal and life for all men. 19For as by one man’s disobedience many were made sinners, so by one man’s obedienc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18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새번역)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개역개정)
제가 주목하는 것은 1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인해 누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생명에 이르렀나요? 대답은 “모든 사람”(all men) (역주: 개역개정판은 “많은 사람”으로 번역.)입니다. (그러니 적어도 우리는 괜찮을 것입니다!)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가 그를 의롭다 하심과 생명으로 이끌지 않은 것이며, 즉 그는 이 구절이 거짓이 되도록 만드는 사람입니다.
저는 주로 18절에 주목하고 있지만, 19절도 여기에 포함시켰습니다. 19절에서 “모든 사람”(all) 대신 “많은 사람”(many) 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만 말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18절의 보편구원론적 함축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9절이 18절의 친-보편구원론적 힘을 빼앗아 가지는 않습니다. 먼저, 논리적 요점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말은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말과 완벽하게 양립할 수 있습니다. 모든 개는 포유류입니다. 그렇다면 많은 개가 포유류라는 것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물론 참입니다. 많은 개가 포유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많은 개가 포유류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많은”과 “모두”는 논리적으로 서로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논리적 요점은 매우 불완전합니다. 많은 개가 포유류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개보다 적은 수의 개가 포유류라는 것을 엄격하게 함축하지는 않지만, 모든 개보다 적은 수의 개가 포유류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래서 많은 개가 포유류라고 말하는 것이 이상하게 들리는 것이겠죠. (“왜 ‘모든’이 아니라 ‘많은’이라고 했을까? 모든 개가 포유류라고 생각했다면 ‘모든’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19절이 모두보다 적은 수가 의롭게 되리라는 것을 엄격하게 함축하지는 않지만 이것을 강력하게 암시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은 그럴듯합니다. 이에 대해 답하자면, 19절에 대한 NIV의 번역을 보면 모든 사람보다 적다는 암시조차도 사라집니다. (위는 RSV 번역입니다.) NIV는 다음과 같이 번역합니다.
로마서 5장 19절 (NIV) 19For just as through the dis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ere made sinners, so also through the obedience of the one man the many will be made righteous.
현재 우리의 목적상 두 번역본의 핵심적인 차이점은 RSV의 “many”와 NIV의 “the many”입니다. the many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지만, 모든 사람보다 적은 사람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며 심지어 암시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NIV의 방식으로 번역된 19절은 특히 바로 18절에 이어서 읽으면, 오히려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19절은 18절의 보편구원론적 독해에 약간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에서 오히려 18절의 보편구원론적 함축을 강화하는 구절로 바뀌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전문가들은 여기 헬라어 원문은 NIV와 같고, RSV와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었는데, 19절에는 모든 사람보다 적은 수가 의롭게 될 것이라는 암시조차 없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RSV의 개정판인 NRSV가 “many”가 아닌 “the many”를 사용함으로써 NIV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점을 고려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영어 성경 번역본이 RSV와 마찬가지로 이 구절을 부정확하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에 먼저 RSV 번역본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페이지를 게시한 이후에 나온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한 논의 중 매우 도움이 되는 글은 리처드 벨(Richard H. Bell)의 “Rom 5.18-19 and Universal Salvation,” New Testament Studies, Vol. 48 (2002), pp. 417-432. 입니다. 이 마지막 구절에 대한 더 나은, 그리고 더 자세한 논의를 보기 원하는 분들은 벨의 논문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벨 자신의 요약을 인용하자면,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롬 5.18-19에서 보편적 구원을 지지한다. 이러한 이해는 문맥과 이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연구에 의해 뒷받침된다.”(p.417.) 2005년 9월 11일에 추가.]3. “모든“
위의 구절들에서 핵심 단어는 “모든”입니다. 이 멋진 단어가 등장하는 보편구원론 구절이 하나 더 있습니다.
로마서 11장 32절 For God has imprisoned all in disobedience so that he may be merciful to all.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개역개정)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새번역)
여러 이유로 여기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지만, 저는 이 구절이 좋은 보편구원론 구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2장에서 살펴본 일부 구절들만큼 강력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 구절을 언급하는 이유는 이 구절에 대한 한 주석가의 주장을 대화에서 여러 차례 들어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번역한 이 구절에 대해 F.F. 브루스(F. F. Bruce)는 “즉,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가 아니라 차별 없이 모든 사람에게”라고 썼습니다. (The Letter of Paul to the Romans: An Introduction and Commentary, Leicester, England: Inter-Varsity Press, 1985; p. 211). 저와 보편구원론 구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몇몇 사람들은 “모든”이 “예외 없이 모든”이 아닌 “차별 없이 모든”을 의미한다고 배웠던 것 같습니다. “모든”이 후자(“차별 없이”)의 의미를 가질 때 “모든”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들은 “각각의 모든 집단에서 일부”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고, 민족과 관련해서라면 각 집단은 각 민족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금 더 많은 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느 집단에 속해 있든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모든’은 적어도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교활한 인물이 조사를 받고 있으며, 조사 중인 사건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수사관에게 넘긴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후 그 교활한 인물은 사건에 관한 모든 자료를 넘겼다고 말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인물은 그 말을 할 당시에도 자료의 절반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이 사실에 대한 그의 반응이 다음과 같다고 가정해 봅시다. “글쎄요, 저는 10가지 중요한 분류에 속하는 자료들을 각각 여러 개씩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가장 유리한 자료만 골라서 넘긴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각 분류에서 넘길 파일을 무작위로 골랐기 때문에 분류에 관계없이, 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얼마나 해가 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모든 파일이 넘겨질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모든 파일을 (차별 없이) 넘겼습니다. 물론 예외 없이 모두 넘긴 것은 아니지만요.” 이것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모든”은 ‘차별 없이 모든’이 때때로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것과 같은 것을 의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제 생각에는 이 사람이 단지 ‘모든’의 여러 좋은 의미들 가운데 한 가지 의미를 사용해서 속인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그는 그보다 더 나쁩니다. 그의 가련한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 수 있는 “모든”의 좋은 의미는 없습니다. “모든”은 제대로 사용될 때 항상 ‘예외 없이 모든’을 의미합니다. 간단히 말해, “모든”은 ‘모든’을 의미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더 자세한 논의는 저의 블로그 글, “All”을 참조하세요. 2011년 12월 24일 추가]
하지만 잠깐! 내가 “모든 맥주는 따뜻하다”라고 말할 때, 나는 온 우주의 모든 맥주가 따뜻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나는 단지 이 방에 있는 모든 맥주가 따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고, 이어서 다른 곳에 차가운 맥주가 있다는 것을 함축하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맥주가 따뜻하니 부엌에 가서 시원한 맥주를 가져오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이 항상 ‘모든’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어떻게 “모든”이 ‘모든’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여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자연 언어의 양화 표현(“모두”, “대부분”, “일부” 등)이 사용되는 경우에 그 범위는 맥락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맥주가 따뜻하다”라고 말했을 때 맥락에서 결정된 범위는 이 방에 있는 것들이므로 맥락상 “모든 맥주”는 이 방에 있는 모든 맥주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가 항상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모두” 또는 “모든 F”는 제한된 범위 내의 모든 것(또는 모든 F)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해당 범위 안에서 “모두”는 실제로 그 범위 안에서는 예외 없이 모두를 의미합니다. “모든 맥주는 따뜻하다”라는 문장은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차가운 맥주가 방에 있다면 거짓으로 판명됩니다.
그러나 범위가 제한된 경우에는 제한된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명확한 단서가 있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및 이와 유사한 구절에서 그러듯이 신약성경에서 “모두”(all)가 사용될 때, “모두”는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떤 제한된 부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생각은 거부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a) 명확하게 드러난 그런 제한된 부류가 없고,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 (b) 화자는 특별히 제한된 부류를 의미하는 경우 그 부류가 무엇인지 명확히 할 의무가 있는데, 현재의 화자의 의도와 목적을 고려할 때 특별히 제한된 부류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으며 (c) 신약에서는 그러한 특별히 제한된 부류를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구절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듯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보편구원론 구절의 “모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어떤 제한된 부류의 사람들이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으며, 성경 필자들은 특별히 제한된 부류의 사람들을 의미하면서 어떤 부류를 의미하는지 명시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밝히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지도 않았습니다. 실제로 고린도전서 15:22과 로마서 5:18에서 등장하는 각각의 “모두”는 (아담 안에서 죽거나 정죄 받은 것이 전 인류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전 인류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는 “모두”가 등장하는 바로 그 문장(그리고 꽤 짧은 문장) 안에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거기에서 전 인류보다 더 적은 수의 사람을 의미했다면, 이것은 특히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거나 심지어 무능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한 문장 (그것도 그 문제에 대해 두 절의 [병행적 구조를 통해] 유사점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문장) 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의 표현이 해석되어야 하는 범위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모두”(all)가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외에는 합리적인 대안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을까요? 타락한 천사를 포함한 천사들, 심지어 사탄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마귀가 “불타는 유황 못에 던져지고”, 짐승과 (분명히 인간이 아닌) 거짓 선지자가 그보다 전에 이미 그곳에 던져졌고, “그들이 영원히 밤낮 괴로움을 받을 것”이라고 보고하는 계 20:10과 같은 구절 외에도) 대부분의 보편구원론 구절들이 거기까지 나아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처럼 단순히 “모두”라고만 쓴 구절도 있는데, 앞서 말했듯이 “모두”의 범위를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사탄을 포함하도록 그 특정 구절을 더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서 사탄이 죽었다는 말이 타당하지 않고 그 구절은 “아담 안에서 모두(all)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all) 삶을 얻으리라.”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행위가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심과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로마서 5장 18절과 같이 보편구원론 구절 중 일부는 명시적으로 인간으로만 한정하고 있습니다.
2장에서 살펴본 보편구원론 구절 중 더 넓은 범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유일한 구절은 골로새서 1장 20절의 “만물을 화목하게”라는 구절입니다. 성경에는 이와 유사한 제안을 담고 있는 다른 구절도 있습니다(에베소서 1:10 참조). 저는 일반적으로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 요한계시록에 훨씬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지만, 이 구절이 요한계시록 20:10과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저는 요한계시록의 많은 부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실제로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 요한이 환상 속에서 보고 들은 일들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만 해석하고 그 이상의 것을 확신하지 않으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이 6장 13절에서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에서 설익은 열매가 떨어지는 것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보고했지만, 저는 별들이 문자 그대로 땅에 떨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요한의 이야기에서 이 사건이 지구를 완전히 멸망시키지 않고 이야기가 계속된다는 사실과 함께) 지구와 별의 상대적 크기에 대한 우리의 현재 지식에 의해 확증되지만, 그러한 지식 없이도 요한계시록의 해당 부분의 장르(요한이 자신이 받은 환상을 보고하는 것)에만 근거하더라도 그러한 구절을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문자 그대로 정확한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 그러한 구절을 정확히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문제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최소한의 의미로 읽는 편입니다. 별이 지구에 떨어진다는 이 보고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의미하는 것은, 또는 적어도 우리가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매우 나쁜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환상에서 보고된 수많은 사건들을 최대한 절제된 방식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 20장 7~10절에 나오는 사탄의 파멸에 대한 보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우리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이 사건을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보고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여기서 최소한으로 읽을 수 있는 것은 악과 속임수가 결정적으로 패배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이상은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고 독단적으로 선언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한 최소한의 해석 이상의 것을 확신할 근거는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따라서 골로새서 1장 20절의 “만물을 화목하게 하신다”는 구절이 요한계시록에서 발견되는 내용 때문에 명백하게 또는 자동적으로 무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두 책의 성격을 고려할 때, 요한계시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오히려 골로새서와 같은 책들의 가르침에 따라 인도되어야 하며, 그 반대는 아닙니다. 요한의 환상에 대한 보고를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정확한 설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해석 때문에 교리에 대한 서신서의 직설적인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자동적으로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도 요한계시록 20장 10절을 실제로 일어날 일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설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여기서 “영원히”(for ever and ever)라고 번역된 구절은 끝없이 지속되는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번역할 필요가 없으며, 사실 문자 그대로를 고집한다면 이 구절을 “세세를 걸쳐”(unto the ages of the ages) 또는 “세세토록”(for the eons of the eons)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문자 그대로의 번역입니다. 문자 그대로는 이 표현은 영원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영원할 필요는 없으며, 그래도 적어도 매우 오랜 시간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비록 제가 여기서 옹호하는 보다 온건한 형태의 보편구원론에 대한 것에 대해 성경적 지지를 찾은 것만큼 사탄까지 포함하는 보다 철저한 보편구원론(초기 보편구원론자 중 한 명인 오리게네스는 이러한 보다 철저한 보편구원론을 주장했습니다)에 대한 성경적 지지를 찾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여기서 그러한 보다 철저한 입장을 옹호하기에 충분한 근거를 찾지는 못했지만, 동시에 저는 확실히 보다 강력한 보편구원론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4.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저는 위에 제시한 친-보편구원론적 구절들을 믿으며, 이미 보셨듯이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제가 위에서 활용하지 않은 다른 보편구원론 구절이 몇 가지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위의 구절들은 보편구원론을 옹호하기 위해 인용할 수 있는 구절의 유형에 대한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구절들이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근거라고는 할 수 없지만(제가 압도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는 관점으로는 배타주의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5-6장을 참조하세요), 꽤 강력하며, 제가 본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어떤 근거들보다도 강력한 근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성경 구절들에 비추어 이 구절들을 해석하라고 촉구합니다. (이 사람들 중 다수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이러한 보편구원론 구절에 비추어 해석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이 구절들을 “해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는 성경의 일부 구절에 대해 해석을 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비유 중 하나에서 우리에게 주는 특정한 메시지를 찾아내는 것도 해석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 구절들을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것을 ‘해석’이라고 부르는 것은 저에게는 부적절해 보입니다. 저는 위의 구절을 단순히 저의 보편구원론을 지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저의 보편구원론을 표현하기 위해 인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인용은 해석이라고 하기에는 어색한 것 같습니다. (한 번은 누군가가 영생을 거부당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제가 성경을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제가 비성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구절이 보편구원론에 찬성하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보편구원론이 거짓이라고 가르치는 구절이 있다면, 우리는 위의 구절에 대한 이해를 다시 조정하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이 구절들이 보이는 것과는 다른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글을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이 보편구원론이 거짓임을 더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근거로 위의 구절에서 보편구원론적 함축을 제거한 이해를 촉구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성경적 근거가 압도적인 것처럼 글을 씁니다. 그러나 이러한 확신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아래 5, 6, 8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는 주로 보편구원론 자체를 비성경적인 형태의 특정한 보편구원론과 혼동하기 때문입니다.
5. 보편구원론과 배타주의
보편구원론을 공격하는 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많은 구절은 배타주의(exclusivism)를 가르치는데, 여기서 배타주의란 오직 (배타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말합니다. 저는 배타주의를 신약성경에서 분명히 가르친다는 데 동의하므로 그 근거 구절을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자라고 해서 배타주의를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성경적 보편구원론자는 배타주의를 받아들일 것이며, 다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구원받을 사람의 범위에 대해 비보편구원론자와 동의하지 않을 뿐입니다. (보편구원론적 배타주의자는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을 반복해서 언급했으니, 이 구절과 2장에서 논의한 다른 구절이 어떻게 보편구원론과 배타주의의 양립을 강조하는지 주목할 가치가 있습니다.
6. 보편구원론과 강한 배타주의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유형의 배타주의를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배타주의에 더해서 그리스도께서 가능하게 하시는 구원의 수혜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 및/또는 그가 제공하는 구원을 명시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을 강한 배타주의(strong exclusivism)로 구분해 봅시다. (이 명시적 수용 조건의 정확한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강한 배타주의의 여러 가지 다른 형태가 있습니다.) 그러면 약한 배타주의(weak exclusivism)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필요하다는 배타주의적 논제, 즉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논제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가능해진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인정할 필요는 없다는 입장을 결합한 입장이 될 것입니다.
배타주의에 대한 성경적 근거는 압도적이지만, 강한 배타주의에 대한 지지는 그렇게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약한 배타주의에 대한 강력한 근거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배타주의의 두 가지 형태 중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배타주의 자체를 지지하는 것만큼 크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강한 배타주의에 대한 암시는 충분히 강력하기 때문에 저는 (여기서 다루지 않을 복잡한 이유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해 확신하지는 못하지만) 강한 배타주의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강한 배타주의가 보편구원론과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강한 배타주의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든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강한 배타주의는 어떤 사람들이 죽는 순간까지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는 관찰과 결합되어 보편구원론의 파멸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이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의 끝을 의미하는 경우에만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죽음이 구원의 기회의 끝이라는 입장에 대한 강력한 성경적 근거에 가까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교리에 대한 일반적인 논증은 몇 단락 아래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사후에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구가 결정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어떤 구절들인가요? 추가적인 기회 교리를 지지하는 많은 친구들은 베드로전서 3장 19~20절과 베드로전서 4장 6절을 그들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구절로 인용합니다.
이제 베드로전서의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만큼이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구절에 기대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제 의견을 말씀드리는 것 외에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습니다. 이 구절은 사후의 추가적인 기회 교리에 대한 합리적인 확신을 불러일으키기에는 결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사후에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반대 교리를 지지하는 입장에 대한 논증 또한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베드로전서 4장 6절에 대한 저질스러운 NIV 스터디 성경 주석에서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이 의심스러운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인용된 유일한 구절은 히브리서 9장 27절입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러나 추가적인 기회를 믿는 보편구원론자라면 사람이 한 번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보편구원론자이고, 그것(죽음)을 부정하지도 않으며, 부정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 언급했듯이, 그리고 8장에서 살펴볼 것처럼, 추가적인 기회를 믿는 보편구원론자를 포함하여 보편구원론자는 그 죽음 이후에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9장 27절에는 추가적인 기회를 믿는 보편구원론자를 불편하게 만들 만한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교리를 지지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다른 구절은 누가복음 16:26입니다. 이 구절은 히브리서 구절보다 약간 더 강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으며,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교리를 위한 총알은 거의 없습니다. 이 구절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나오기 때문에, 신학적 교리를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 추출하려는 시도에 내재된 모든 한계, 특히 문제의 교리가 비유의 요점이 아닐 때 발생하는 한계로 인해 이 구절에 대한 호소는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지금은 죽어 지옥에서 고통받는 부자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을 물에 담가 내 혀를 식혀 달라”(24절)고 요청합니다. 26절은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에 대한 아브라함의 설명의 두 번째 부분으로, “이 모든 것 외에도 우리와 너희 사이에 큰 틈이 막혀 있어서 여기서 너희에게 가고자 하는 사람은 건너갈 수 없고, 저기에서 우리에게로 건너오는 사람도 없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보편구원론자는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필요가 없으며 그러한 형벌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점만 부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형벌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형벌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마음대로 형벌을 끝내고 지옥에서 천국으로 자유롭게 건너갈 수 있으며,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비유에서 “아브라함 곁에 있는” 나사로)이 지옥을 방문할 수 있다고 주장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이 비유의 세부 사항에서 더 이상의 기회가 있는지 여부에 대한 입장을 도출하려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해도 이 구절을 더 이상의 기회가 없다는 교리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근거가 전혀 없습니다. 더 많은 기회를 믿는 보편구원론자가 형벌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원할 때 형벌을 끝낼 수 없다는 가능성을 현명하게 허용하는 한, 그는 이 비유에서 아버지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나오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도로가 충분히 깊은 눈으로 덮여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기 위해 그 길을 운전해야 하는 누군가에게 “당신은 거기서 우리 쪽으로 건너올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며칠 후에 도로가 치워질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거나, 아주 위급한 상황이라면 오늘이라도 헬리콥터를 이용해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리는 이 말을 아주 적절하고 진실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건너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지 않나요? 네, 그렇게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의미도 있고,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완벽한 의미도 있습니다. “할 수 있다”의 의미와 관련 단어에 대한 명쾌하고 접근하기 쉬운 설명을 위해 안젤리카 크라처(Angelica Kratzer)의 “What ‘Must’ and ‘Can’ Must and Can Mean” (Linguistics and Philosophy 1 (1977): pp. 337-355)과 데이비드 루이스(David Lewis )의 “Scorekeeping in a Language Game” (Journal of Philosophical Logic 8 (1979): pp. 339-359.의 예 6(“Relative Modality “)을 추천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형벌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언제든지 형벌을 끝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으로도 형벌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절망적인 시도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저는 다음 세 가지 점에서 다른 어떤 교리도 “더 이상의 기회 없음” 교리와 경쟁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교리도 a) 그토록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강력하게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b) 그 결과는 완전히 비참하고 c) 성경적 뒷받침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에 근접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앞서 인정했듯이 추가적 기회 교리를 베드로전서 구절에 근거해서 주장하는 것 또한 결정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베드로전서 구절을 보편구원론에 대한 긍정적인 지지 근거로 사용할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저의 보편구원론은 2절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구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구절들이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데 있어 반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그 어떤 구절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고 반 보편구원론의 강력한 근거는 강한 배타주의에 더해 어떤 사람들은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매우 그럴듯한 관찰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나는 단지 그러한 사고 방식은 더 이상 기회가 없다는 교리가 확립될 수 있는 경우에만 반 보편구원론을 지지한다는 점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그것은 그리 설득력이 있지 않습니다. 확실히 보편구원론 구절의 힘에 근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문제에 대한 제 최선의 판단과는 달리 실제로 베드로전서 구절을 통해 추가 기회에 대한 교리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면, 그것은 논증적으로 필요한 것 이상의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사후에 또 다른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나요? 네, 하지만 베드로전서에서 찾을 수 있는 내용 때문은 아닙니다. 추가적 기회에 대한 저의 믿음은 오히려 (a) 2장에서 소개한 것과 같은 구절들이 제공하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상당히 강력한 근거가 있고, (b) 여기서 살펴보지 않았지만 강한 배타주의를 상당히 강력히 지지해주는 구절들이 있으고, (c) 보편구원론과 강한 배타주의를 조화시키는 유일한 방법(적어도 제가 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추가적인 기회가 있는 경우이며, (d) 추가 기회가 있다는 것을 부인할 만한 좋은 이유가 거의 없다는 믿음에 근거를 둡니다. 따라서 베드로전서 구절과 같이 더 많은 기회가 있다는 직접적인 근거는 많지 않지만, (d)에 비추어 볼 때 (a)-(c)가 제공하는 더 많은 기회에 대한 간접적인 근거는 결정적인 것으로 입증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저의 믿음이 추가적 기회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7. 추가적인 두 구절, 그리고 위험한 사고방식
추가적 기회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핵심 논점에서 잠시 벗어나 두 개의 구절을 더 소개하겠습니다. 이 두 구절은, 함께 읽는다면, 추가적 기회 교리와 관련된 방식으로 보편구원론적 경향을 보여줍니다. 제가 이 구절들을 소개하는 이유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추가적인 지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가 추가적 기회 교리에 대해 가졌던 저항의 상당 부분을 설명해주는 위험한 사고방식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가 그랬던 것과 같은 이유로 추가 기회의 교리에 저항하는 한, 그들은 이 위험한 사고방식을 점검해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 구절을 생각해 보십시오.
로마서 10장 9절 If you confess with your mouth, “Jesus is Lord,” and believe in your hear that God raised him from the dead, you will be saved.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개역개정)
이 구절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누가 그렇게 시인하고 그렇게 믿을까요? 이것은 적어도 시인 부분과 관련해서는 성경에서 답을 얻을 수 있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빌립보서 2장 11절과 다른 곳에서 우리가 읽은 것처럼 모든 입이 예수를 주라 시인하여 고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고백자 중 일부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항상 이 고백이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것이 고통스럽게 명백해졌을 때, 아마도 심판의 순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상상했기 때문에 이 고백자들이 믿지 않는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제가 빌립보서 구절이 로마서 구절과 맞물려 보편구원론적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런 고백은 “너무 늦은” 것이어서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로마서 10장 9절에는 고백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죽기 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취지의 어떠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더 이상의 기회를 부정할 만한 성경적 이유도 거의 없습니다. 고백이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제 경우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고백하겠지. 그때는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이 너무나 명백할 테니까. 그 시점에 고백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아이쿠! 저는 항상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지며, 구원받는 사람의 공로는 전혀 없다고 배웠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고백과 같은 방법으로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위의 일련의 생각은 보상을 공로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저에게 너무 강해서 위의 이야기에서 고백과 수용 부분을 공로의 문제로 바꾸어 놓았음을 보여줍니다. 충분한 공로가 없는 경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말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세 가지 반응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그러한 고백이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질지 충분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둘째, 그게 중요할까요? 셋째, 나의 고백과 수용이 얼마나 대단한 공로일까요?
다른 사람들이 제가 가졌던 위험한 생각에 빠져 있다면, 그들은 구원에서 공로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추가 기회의 교리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제가 이런 생각을 한 유일한 사람인지도 모르겠고, 이 짧은 여담은 다행히도 아무 쓸모가 없는 이야기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8. 보편구원론, 심판, 형벌
보편구원론에 대한 공격에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많은 구절은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사람들을 심판하고 많은 사람들을 벌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실제로 보편구원론에 대한 반론이 압도적인 것처럼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은 반보편구원론 성경 구절이라고 주장하는 긴 목록에서 이러한 수많은 구절들을 나열하는데 그것은 매우 인상적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인용되는 많은 구절들은 준비되지 않았거나 다른 방식으로 못된 사람들이 쫓겨나서 울고 통곡하고 이를 갈고 있는 비유들의 결말입니다. (이러한 결말은 일반적으로 마태복음에서 제시하는 비유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 비유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비약적인 해석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절 중 많은 구절들을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겪게 될 고난을 예견하는 것으로 읽습니다. 마태복음이 기록될 당시 유대 공동체에서는 이 끔찍하고 참혹한 사건이 (일부 비기독교인들의 주장했듯이) 기독교인들이 거짓 메시아를 따랐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히려 (일부 기독교인들이 주장했듯이) 비기독교인 유대인들이 심판의 때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인지 큰 논란이 되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이 쫓겨나 울고 통곡하는 비유 등은 이 논쟁에서 기독교 측의 주장으로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을 기각하더라도 (그러한 기각의 근거를 보기는 어렵지만) 그러한 비유에서 특정 신학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지 인식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부차적인 요점인데, 특히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많은 구절이 비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1장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제가 이해하는 보편구원론은,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2장에서 제시한 것과 같은 보편구원론 구절에 의해 뒷받침되는 보편구원론은 모두에게 심판이 있고 일부에게는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구원론자가 과도하게 나가서 처벌이 전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한(2장의 구절에서 허용되지 않는 보편구원론의 확장), 처벌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이 구절들은 그러한 입장에 타격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배타주의에서 나온 반보편구원론 논증 및 강한 배타주의에서 나온 논증과 마찬가지로, 이제 형벌에 근거한 반보편구원론 논증은 보편구원론 구절들이 뒷받침해주는 보편구원론에 대해서는 아무런 효력이 없으며 일부 현명하지 못한 보편구원론자가 할 수 있는 보편구원론의 부당한 확장에 대해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9. 보편구원론과 영원한 형벌: 충돌?
그러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많은 구절들 중에서 그 형벌이 “영원한 것”이라고 명시하고 있거나 명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구절들이 몇 개 있습니다(극히 적지만 마태복음 25:46도 참조). 이 구절들 중 가장 강력한 구절은 다음의 구절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 They shall suffer punishment of eternal destruction and exclusion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from the glory of his might. 이런 자들은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개역개정)
마침내, 우리는 보편구원론에 대항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구절을 만나게 됐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은 비유의 일부라는 사실 때문에 약화됩니다. 사실, 이 비유를 형벌의 기간에 대한 좋은 근거로 인용하는 많은 사람들은 상을 받는 사람과 벌을 받는 사람을 구별하는 근거에 대해 이 비유가 주는 가르침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상을 받는 사람은 선한 행동으로 인해 상을 받고, 벌을 받는 사람은 그러한 선한 행동의 부족으로 인해 벌을 받는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34-36절과 41-43절 참조, 각각에서 “때문에” 또는 “왜냐하면”(번역에 따라 다름)이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보세요). 그러나 형벌의 기간에 대한 좋은 근거로이 비유를 인용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위에 의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비유로 가르쳐진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세부 사항들이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 것일까요?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유의 이러한 특징을 실제 형벌의 기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큰 비중을 두고 싶다면 “영원한”의 의미에 대한 아래 논의가 이 마태복음 구절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형벌이 영원할 것이라고 (적어도 어떤 사람들이 보기에는) 명시한 구절은 몇 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보편구원론 구절은 상당히 강해서 이 영원한 형벌 구절을 ‘해석’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하지만 이 데살로니가후서 구절은 매우 명확해 보입니다. 저는 이 구절을 “킬러 텍스트”라고 부르곤 했죠. 이 구절은 보편구원론 구절과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랫동안 저는 성경에서 그런 충돌이 일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저는 보편구원론 구절을 “해석”해버린 다음이 영원한 형벌 구절에 대해서도 똑같이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든 “해석들”은 매우 어려워 보였습니다. “해석”되는 관련 구절에서 말한 내용을 부정하거나 최소한 수정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10. 신약성경에서 “영원한”의 의미
다행히도 이것은 외견상 충돌일 뿐입니다. 이러한 충돌은 우리 영어 성경의 “영원한”이라는 번역에서 발생하는 문제로 인해 나타납니다.
우리 영어 성경이 “영원한”(eternal) 또는 ” 영속적인”(everlasting, 및 그 유사어)으로 번역하는 헬라어 형용사(및 그 유사어)는 문자 그대로 “시대에 걸쳐 지속되는”(age-enduring) 또는 “시대와 관련된”(pertaining to an age)을 의미하며, 끝없는 지속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충돌을 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줍니다. “영원한” 형벌 구절의 “영원한”이 끝없는 지속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이 구절과 보편구원론 구절 사이에는 충돌이 없습니다.
이러한 충돌을 어렵고 절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매우 편안하게 해결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어 단어가 무한한 지속 시간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 자체에서, 그리고 심지어 바울서신에서도 그러한 의미로 실제로 자주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번역본에 따르면 로마서 16장 25~26절은 “오랜 세월 동안 비밀로 간직되었으나 이제는 드러난 비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오랜 세월 동안”으로 번역된 그리스어에는 “영원한” 형벌 구절을 포함하여 다른 곳에서는 “영원” 또는 “영원한”으로 번역된 바로 그 그리스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 구절에서 바울은 이 단어가 “영원한”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바로 이어서 “이제 그 비밀이 드러났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당연히 그 비밀은 영원히 비밀로 유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번역본에서는 이것을 “영원히”라고 번역하지 않은 것입니다.
덧붙여서, 마태복음 25장 46절에 나오는 저주받은 자와 구원받은 자의 운명 – “그러면 그들은 영원한 형벌에 가고 의로운 자는 영생에 가리라”- 의 평행성을 강조하는 일부 사람들이 형벌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것을 부정한다면 구원받은 자의 “영원한” 생명도 끝이 없다는 것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따라 나오지 않습니다. “영원”으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단어가 끝없는 지속 시간을 함축하지는 않지만, 끝없는 지속 시간보다 짧은 것을 함축하지도 않습니다. “다가올 시대에” 또는 “오랜 세월 동안”을 의미할 수도 있고, 탈봇의 다른 제안이 옳다면 “영원하신 하나님에 그 근원을 두고”와 같은 의미를 가질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영원한”이라고 불리는 것이 영원히 지속될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관련하여 중립적인 의미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원한”을 그렇게 읽는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의 “영원한” 생명이 끝날 것이라는 것을 함축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태복음 25:46의 평행 구절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영원한” 생명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을 그 구절에 근거하여 확신할 수 없다는 점뿐입니다. 하지만 희망적이게도 우리에게는 비유의 세부 사항 외에도 믿음의 다른 근거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이 구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위에 링크된 핸슨 논문의 “THE PRINCIPAL PROOF-TEXT”(여러 개의 번호가 매겨진 절이 포함되어 있음) 절을 참조하세요. 구원받은 자의 축복된 삶에는 적용되지만 형벌에는 적용되지 않는, 끝없는 지속을 가르치는 헬라어 단어에 대해서는 “WORDS TEACHING ENDLESS DURATION” 절을 참조하십시오).
바울 자신이 관련 헬라어 단어를 끝없는 지속 시간을 의미하지 않는 방식으로 사용한다는 사실은 그가 “영원한 형벌” 구절에서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을 매우 현실적인 것으로 만듭니다. 이에 반해, 2장에서 살펴본 구절과 같은 보편구원론적 의미를 회피하려는 모든 시도는 매우 어렵고 심지어 절망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가령 다음 같은 시도.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만물을 자신과 화해시키신다는 말은, 적어도 사람들에게 적용될 때, (말 그대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자신과 화해할 기회를 주신다는 뜻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것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될 기회가 주어지거나 모든 사람이 구원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적어도 보편구원론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는 가장 강력한 성경적 근거가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외견상 보편구원론적으로 보이는 구절이 다르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설명해야 할 것이 많습니다.
11. 결론
로마서 11장 32절이 보편구원론 구절이라는 저의 생각이 옳다면, 그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구절, 즉 로마서 11장 33-36절의 바울의 놀라운 찬가는 보편구원론 사상의 영감을 받은 것이며, 그중 뒤에서 두 번째 줄은 보편구원론적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보편구원론은 단순한 메마른 신학의 교리와는 거리가 멀며, 바울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믿음에서 큰 기쁨을 얻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인간들도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한 생명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고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딤전 2:4) 하나님에 의해 얼마나 놀랍고 완전한 승리가 이루어질지를 생각하며 기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비보편구원론적 그림은 이상하게 어둡게 보일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이 그림에서 일부 동료들을 기다리고 있는 끔찍한 운명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러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하시고 부분적인 승리만 거두심으로써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그분의 소망이 궁극적으로 좌절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 자신은 하나님에 대한 이전의 사고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 이전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그들 중 일부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God has bound all men over to disobedience so that he might have mercy on some of them.)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부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For as in Adam all die, so also in Christ shall some be made alive.)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 중 일부가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다.(For in Christ, all the fulness of God was pleased to dwell, and through him to reconcile to himself some things, whether on earth on in heaven, making peace by the blood of his cross.)
그런즉 한 사람의 범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일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Then, as one man’s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men, so 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acquittal and life for some men.)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웹페이지는 엄청난 양의 이메일 교환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웹페이지에서 다루고 있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사람들이 생각해 보게 된 것에 대해 매우 기쁘게 생각하며, 특히 몇몇 사람들이 이 주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생각하여 매우 사려 깊은 응답을 작성했다는 사실에 매우 만족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저에게 메일을 보내주시는 것은 환영하지만, 제가 받는 모든 의견, 심지어 사려 깊은 의견에 대해서도 모두 답변할 수는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답변하지 않더라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바쁜 시간에 연락을 주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쁘더라도 제가 받는 메시지 중 극히 일부에만 응답할 수 있습니다. -KDR
부록
위의 모든 내용은 1998년 초에 성인을 위한 성경 공부를 위해 작성한 이후로 기본적으로 내용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유일한 변화는 나중에 10장에 추가한 몇 가지 참고 문헌과 다른 웹 사이트 링크, 그리고 2장 끝에 업데이트 사항으로 추가하고 표시한 참고 문헌입니다). 98-99년 겨울에 위의 내용을 인터넷에 게시한 이후 많은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제가 받은 메일들 중 일부는 실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아래에서는 제가 가장 자주 질문을 받았던 두 가지 영역에 대해 간략히 다루겠습니다. 첫 번째는 보편구원론을 믿고 조장하는 것의 위험성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는 보편구원론과 자유 의지를 조화시킬 때 발생하는 철학적 문제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두 경우 모두 보편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근거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제는 아닙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다루면 원래 글의 주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가지가 위와 관련하여 가장 자주 제기되는 우려의 영역이므로 여기서 다룰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이 문제에 대한 잘못된 믿음의 위험성
많은 사람들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 보편구원론을 믿고 조장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해 왔습니다. 밀접하게 관련된 두 가지 위험성이 강조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이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인다면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할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고,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이 복음 전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을 조장하는 것이 잠재적 기독교인들에게 미칠 수 있는 해로운 영향에 초점을 맞추고, 많은 사람들이 “어차피 괜찮을 텐데 굳이 그리스도를 영접할 필요가 있나?”라는 생각을 할 것이라고 가정합니다.
저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이 위와 같은 효과를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편구원론(적어도 제가 이 용어로 지칭한 입장)이 그리스도를 현세에 받아들이는지 아니면 내세에 받아들이는지 그 시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편구원론이 배제하는 것은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히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이라는 (그리고 아마도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무한히 커다란 채찍’뿐입니다. 제가 강조했듯이, 보편구원론 자체는 사후에 어떤 사람들에게 형벌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큰 처벌이있을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채찍의 존재뿐만 아니라 매우 큰 (정말로 엄청나게 큰) 채찍의 존재와도 조화되지만, 물론 보편구원론자들은 채찍의 성격과 크기에 대해 서로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보편구원론이 배제하는 것은 무한히 큰 채찍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무한히 큰 채찍을 맞닥뜨렸을 때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강력한 이유나 동기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보편구원론은 또한 모든 인간이 결국 엄청난 당근을 얻게 될 것이라고 보장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동안 자신과 타인을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개선하려는 동기를 제거할까요? 보편구원론자이든 아니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결국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지만 그 동안 자신의 삶을 개선하는 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 다른 사람들(예: 사랑하는 사람)이 천국에 갈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그 와중에도 그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데 관심을 잃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모든 사람이 결국에는 괜찮아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 사이에도 삶을 개선하려는 모든 동기를 약화시켜야 할까요? 특히 그 ‘사이’가 매우 긴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보편구원론에 부합하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한 보편구원론자는 모든 사람이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지만, 천국에서 어떤 존재가 될지는 지상의 삶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도 보편구원론과 조화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가치가 있습니다. 따라서 보편구원론자는 지상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즉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했는지 여부가 천국에 갈지 여부를 결정하지는 않더라도 영원한 의미를 가질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물론 그렇게 주장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나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이 위에서 언급된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는 저의 생각이 옳다고 하더라도,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이 적어도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런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이 자신에게 그렇게 나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믿음이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제가 그들보다 더 잘 판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바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에 대한 믿음의 잠재적 위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에 수반되는 잠재적 위험성은 무시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보편구원론 수용의 해로운 영향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많은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의 확산에 저항하는 논거의 일부로 반대편에는 위험이 없다고 명시적으로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습니다. 반대편에는 위험이 존재합니다. 저는 영원한 지옥 교리가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이메일을 받았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 교리를 믿는 것이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 큰 방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영원한 지옥 교리를 피하기 위해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며, 천국에 가지 못한 사람은 (결국에는 또는 즉시) 소멸된다는 관점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이 가장 사실에 부합하는 견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보편구원론은 그들이 가장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기독교 버전입니다.
잠시 보편구원론이 옳다고 가정하고,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영원히 배제하는 것을 허용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옳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하나님이 그러한 배제를 허용할 것이라는 잘못된 견해를 조장하는 것은 큰 해를 끼칩니다. 실제로 저를 포함한 많은 보편구원론자들은 비보편구원론이 기독교 교회에서 지금까지 조장된 가장 해로운 거짓 중 하나라고 믿습니다.
위험성은 양쪽 모두에 있습니다. 어느 쪽이 옳든, 잘못된 견해를 옹호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자신이 옳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믿는 진리를 옹호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보편구원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제가 그 진리를 홍보하면 일부 사람들이 믿음을 잃게 되어 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보편구원론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거짓이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은 일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험에 대한 한 가지 가능한 대응은 어느 쪽에 있든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발언할 수 있었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에 침묵하는 것 또한 심각한 위험이 있습니다. 2010년 8월 6일.] 또 다른 대응책은 다른 사람들이 고려해볼 수 있도록 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선택한 길이며, 저를 반대하기 위해 글을 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여러분이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고(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제시된 보편구원론에 대한 찬반 구절뿐만 아니라 그 구절을 둘러싼 자료와 그 맥락을 제공하는 자료를 읽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그 문제를 고려해보도록 했다면, 비록 제 입장을 설득하지 못했더라도 저는 기쁠 것입니다.
B. 자유의지와 보편구원론(2003년 6월 13일)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신 많은 분들이 자유의지에 대해 걱정해 주셨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나요? 이것은 강한 배타주의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강한 배타주의(strong exclusivism)는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든 명시적으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우리는 여기에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입장을 열성적 배타주의(fervent exclusivism)라고 부르겠습니다. 열성적 배타주의를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열성적 배타주의 자체에 대한 강력한 성경적 근거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강한 배타주의의 자연스러운 확장이며, 제 생각에 강한 배타주의는 상당한 성경적 근거가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생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영접하는 것이 매우 가치 있고 중요하며, 아마도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이 달려 있을 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열성적 배타주의에 끌리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열성적 배타주의도 보편구원론과 양립할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전자는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후자는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모두 참일 수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결국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나 두 입장이 모두 참인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이 정말 타당할까요? 더 이상의 기회를 배제하는 것이 없다고 가정하면, 즉 자유로운 수용이 죽음 이후에 일어날 수 있다고 가정하면(위의 6절과 7절 참조), 그렇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봅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는”(딤전 2:4) 전능하시고 무한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분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저는 그분에 반대해서 내기를 걸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매우 완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생에서 엄청나게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짧은 생애에서도 이 세 가지 문제를 모두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 주님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사례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시 말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가지실 수 있는 하나님이 결국 모든 사람을 설득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비관론의 근거는 없다고 봅니다.
(만약 당신이 이생에서 가장 극적으로 변화된 사건들이 관련된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구원받았다는 데 동의한다면, 당신은 열성적 배타주의자가 아니며, 죽음 이후에 그러한 자유롭지 않은 구원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열성적 배타주의자만을 대상으로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다른 걱정을 하는 것 같습니다. 열성적 배타주의가 보편구원론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열성적 배타주의가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무엇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에 신조차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으리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또는 적어도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편구원론이 결국 사실로 드러날 것이라고 해도 우리는 지금 그것을 알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이미 우리에게 알려주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 우려에 따르면 열성적 배타주의는 보편구원론이 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는 않지만 보편구원론이 성경에 계시되었다는 입장을 약화시킵니다.
따라서 이 새로운 우려는 자유 의지가 예지와 양립할 수 없다는 가정, 즉 신조차도 누군가가 자유롭게 무엇을 할 것인지 미리 아는 것(적어도 확실하게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가정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무엇을 할지를 모르시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전지하실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세요. 전지하다는 것은 모든 진리를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피조물이 무엇을 자유롭게 할 것인지 안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피조물이 미래에 무엇을 자유롭게 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진리 자체가 없다고 믿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이 2+2 = 796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자유롭게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신이 전지하지 않다는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두 경우 모두 문제의 명제가 (현재) 참이 아니며, 따라서 두 경우 모두 (현재) 알 수 있는 종류의 명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자유가 예지와 양립할 수 없다는 가정이 하나님의 전지함을 훼손하지는 않지만, 이는 매우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대부분의 유신론자들은 이 가정을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전통적으로 많은 유신론자들은 자유로운 행위가 예지뿐만 아니라 신적 결정론과도 양립할 수 있다고 여겨왔습니다. 즉, 신의 명령이 인과적으로 특정 행동을 하도록 결정하더라도 사람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내려진 신의 명령이 인과적으로 사람의 행동을 결정한다면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자유와 결정론에 대한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이라는 입장은 항상 저에게 매우 믿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자유와 결정론에 대한 양립가능론을 거부하는 저와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 중에도 많은 (그리고 제 생각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와 예지의 양립가능성을 인정합니다.
하나님이 이생에서 누가 자신을 자유롭게 받아들일지 미리 아신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자유와 예지에 대한 양립불가능론자(incompatibilist)가 아니어야 하며, 다가올 생에서 누가 자신을 자유롭게 받아들일지 미리 아실 수 있다고 가정하는 데 아무런 이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반대의견은 여러분에게 아무런 무게도 실어주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당신이 예지가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따라서 하나님은 사람들이 이생에서도 자유롭게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소수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그렇지만 기독교인이든 비기독교인이든 철학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이 양립불가능론 (자유와 예지에 관한 양립불가능론을 자유가 사전 결정과 양립할 수 없다는 온건한 견해와 구별하기 위해서 열렬한(zealous) 양립불가능론이라고 부릅시다.)을 열성적 배타주의와 결합하여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데 사용한다면, 당신은 당신의 주장이 다소 완곡하게 말하자면 매우 논쟁적인 가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보편구원론에 대한 ‘치명적인’ 반대가 아닙니다. 자유에 대한 이러한 우려로부터 얻을 수 있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반대의 강도를 평가하는 것과 관련하여 중요한 점은, 이 반대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입장, 즉 열성적 배타주의와 열렬한 비양립주의라는 두 가지 입장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보편구원론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역시 이러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견해에 어느 정도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열렬한/열성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에 매력을 느끼는 분들을 위해 열성적 배타주의(또는 적어도 그에 가까운 것)와 보편구원론(또는 적어도 그에 가까운 것)를 열렬한 비양립주의와 함께 일관된 견해의 형태로 묶는 방법에 대한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는 보편구원론에서, 다른 하나는 열렬한 배타주의에서 약간 타협하는 것입니다.
선택지 1: 열렬한 비양립주의(자유는 예지와 양립할 수 없다)와 열성적 배타주의(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를 매우 확고하게 고수하면서, 절대적으로 확실하지는 않지만 결국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구원받을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영원히 저항할 확률은 매우 작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만큼의 시간을 가지실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고 있고 자신의 손에 맡겨 두면 잘못된 방향으로의 진전을 가속화하는 것 외에는 어떤것도 할 것이라는 징후를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은 자신의 손에 그대로 방치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놀라울 정도로 극적인 반전의 사례가 실제로 존재하며, 열성적 배타주의자에 따르면 신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돌이키도록 개입합니다. 따라서 죽음이 기회의 끝이라는 비참하고 지지받지 못하는 견해를 버리고 나면, 그러한 신적인 활동이 다가올 삶에서도 계속될 것이며 (적어도 결국에는) 자유로운 수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선택을 하는 사람이라면 여전히 보편구원론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믿으며, 신학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에서는 어차피 그 정도의 확실성을 넘어서는 것은 기대할 수 없으니까요. (사실, 어려운 질문에 대한 인간의 오류라는 일반적인 원인으로 인해 우리는 이 문제나 다른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어차피 그 수준의 확신에 도달하지도 못할 것이며, 심지어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문제에 대해 (당연히!)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확고하든 잠정적이든) 자신이 취하는 입장에 따라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 못할 (매우 작지만 여전히 존재하는) 객관적인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보편구원론을 약간 타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조차도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하지 않으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계시하셨을지에 대한 끈질긴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불편함을 느끼기 쉽습니다. 우리에게 계시하신 내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절대적이지 않지만 그에 가까운 정도로 확신하셨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선택지 2: 하나님께서는 먼 미래의 어느 시점을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고자 하는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설득 수단을 고려할 때 그때까지 모든 사람이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을 정도로 충분히 먼 시점을 선택하신 후, 그 시점에 남아 있는 모든 보류자들을 강제로 받아들이도록 하기로 결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그 받아들이는 것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지만, 그 받아들이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수용이 가치가 떨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으며 따라서 책임감 있게 우리에게 계시할 수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여러분이 직접 떠올리고 생각해 볼 수 있는 많은 다양한 변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개인마다 다른 시간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매우 사변적인 것이므로 이러한 이야기에 지나치게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특정 견해의 조합이 실현될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보여 주며, 따라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지 세부적으로 확신할 수 없더라도 그 견해 자체가 양립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유용한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인간의 자유의 가치와 중요성을 크게 존중하는 가운데서도 열렬한 비양립주의와 보편구원론, 심지어 예지적 보편구원론이 모두 참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를 자유롭게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열성적 배타주의(강한 배타주의나 단순한 배타주의는 아니지만)를 포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견해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자유로운 영접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이는 계획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열성적 배타주의의 동기, 즉 인간 자유의 중요성을 수용하는 데 있어 적절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여전히 자유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강제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더 좋고 가치 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구원을 받기 위해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므로 열성적 배타주의를 부정합니다. 하지만 열성적 배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자유로운 수용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타협적 입장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려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러한 타협적 입장은 애초에 열성적 배타주의자가 되는 이유에 대해 제가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다면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즉, 열성적 배타주의 자체에 대한 실질적인 성경적 지지는 없지만, 열성적 배타주의는 (상당한 지지를 받는) 강한 배타주의와 인간의 자유가 중요하다는 신념이 결합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입니다. 타협적 입장은 인간의 자유의 중요성을 존중하기 때문에 매력적인 타협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위의 선택지들은 자유, 예지, 구원과 관련된 특정 견해의 조합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잠재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이드로서 간략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위의 여러 단락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중요한 점은,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이러한 생각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강력한 반대는 없다는 점입니다.
더 읽을 것들
다음 자료들은 보편구원론과 성경이라는 주제에 대해 더 읽어보실 분들을 위해 Keith DeRose가 추천하는 자료입니다. -ZDR
보편구원론에 관한 추천 도서
- That All Shall Be Saved: Heaven, Hell & Universal Salvation, by David Bentley Hart, Yale University Press, 2019.
- The Inescapable Love of God, by Thomas Talbott. 철학자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t)의 보편구원론에 대한 훌륭한 옹호
- Universal Salvation?: The Current Debate, edited by Robin A. Perry & Christopher H. Partridge. 제1부는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t)이 보편구원론을 옹호하는 글이고, 제2부에서 제5부 까지는 탈봇에 대한 다양한 복음주의 저자들의 “성경적 응답”, “철학적 응답”, “신학적 응답”, “역사적 응답”이며, 제6부는 이러한 응답에 대한 탈봇의 답변입니다.
- The Evangelical Universalist by Gregory MacDonald (pseudonym). 저는 아직도 이 책을 다 읽지는 못했지만, 제가 읽은 부분은 아주 좋았으며, 저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 몇몇 사람들은 자기가 말하는 바를 정말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 If Grace Is True: Why God Will Save Every Person, by Philip Gulley and James Mulholland.
이 책은 꽤 귀중한 책이지만, 저는 이 책의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크게 이견이 있습니다. 제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은 대부분 5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웹 페이지의 관심사과 가장 관련이 있는 부분을 보자면, Gulley와 Mulholland는 제가 “배타주의”라고 부르는 입장, 즉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들이 구원받는다는 견해를 거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배타주의에 대한 부정이 보편구원론에서 직접적으로 도출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124-5쪽 참조], 어쨌든 제가 보기에는 배타주의를 부정할 다른 이유는 제시되지 않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듯이, 보편구원론은 제가 여기서 배타주의라고 부르는 것과 공존할 수 있으며, 심지어 강력한 배타주의, 심지어 열렬한 배타주의와도 공존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G&M은 보편구원론이 배타주의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에는 동의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의 주장은 보편구원론이 배타주의와 비배타주의 모두와 양립할 수 있지만, 비배타주의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이지만, 1인칭 단수형으로 글을 썼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을 때 저는 삼위일체, 성육신, 속죄 신학 등 전통적인 기독교 공식을 고수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는 이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붓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지 금방 깨달았습니다. 오래된 부대는 항상 터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포도주가 발효되면 낡은 가죽이 손상되고 찢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저의 확장된 견해는 어린 시절 신학의 신뢰성을 떨어뜨렸습니다.”(125-6쪽). 아마도 배타주의도 G&M이 이제 보편구원론이라는 새 포도주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 낡은 포도주 가죽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인용한 구절에서 배타주의를 어린 시절의 “속죄 신학”의 일부로 포함시키려고 의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제 경험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제가 자라면서 배운 기독교 신학은 G&M이 배웠던 것과 매우 유사해 보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신학의 여러 요소들을 고려할 때 왜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지 항상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구원이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료로 주시는 선물이라면 왜 일부에게만 이 선물이 주어질까요? 물론 이 질문에 대한 일반적인 답변이 있었지만, 한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그럴 듯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럴듯해 보였던 한 가지 이유는 일부만 선물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지만, 이 대답은 적어도 많은 경우에 왜 더 나은 상황에서 이 제안이 이루어지지 않는지에 대한 의문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제가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였을 때, 저는 그것이 보편구원론을 부정하는 것보다 어린 시절 신학의 관련 요소들과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보편구원론은 오래된 포도주 가죽을 긴장시키고 터뜨리는 새 포도주가 아니라, 이전에 수수께끼 같았던 어린 시절 신학의 많은 요소들이 마침내 합쳐지고 이해가 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 Love Wins: A Book About Heaven, Hell, and the Fate of Every Person Who Ever Lived, by Rob Bell.(한국어 번역본: 『사랑이 이긴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지금까지 살았던 모든 인간의 운명에 관하여』, 양혜원 역, 포이에마, 2011)12/23/2011 이 책이 보편구원론을 옹호하는지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었고, 벨 자신은 책이 출간될 무렵 인터뷰에서 보편구원론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벨의 부정은 어떤 입장이 보편구원론자로 간주되기 위해 무엇이 요구되는지에 대한 지나치게 엄격한 기준에 근거한 것처럼 보였지만, 저는 결국 (그가 제시한 이유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의 부정을 받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보편구원론적 입장에 대한 훌륭하고 공감할 만한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 견해는 벨 자신의 견해라기보다 논의되어야 할 견해로 제시되었습니다. 벨이 이 견해를 훌륭하고 설득력 있게 제시했기 때문에 보편구원론자로 알려지게 된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지옥에 대한 전통적인 교리 아래서 괴로워하고 대안적인 비전을 갈망하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이 많은 독자들에게 말 그대로 하나님의 선물이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 대한 톰 탈봇의 짧지만 멋진 서평을 여기에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보편구원론 관련 추천 블로그 게시물
저는 “Generous Orthodoxy Think Tank” 그룹 웹로그에 올린 아래 게시물들에서 기독교 보편구원론을 둘러싼 몇 가지 문제(보편구원론에 대한 성경적 찬반 논거는 아니지만, 게시물에 대한 일부 댓글에서 성경에 대한 논의가 등장합니다.)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 “The Problem with Universalism?” 5/27/2006
(한국어 번역: “보편구원론의 문제점”?, 댓글 토론) - Hoping that Universalism Is/Will Be True 6/6/2006
(한국어 번역: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참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에 대해서, 댓글 포함) - Underground Universalism? 6/8/2006
(한국어 번역: 지하의 보편구원론?, 댓글 포함)
저는 또한 “Generous Orthodoxy Think Tank””에 『복음주의적 보편구원론자』의 저자 그레고리 맥도날드(가명)가 보내온 글을 게시했습니다(위의 “추천 도서” 참조).
- “Can an Evangelical Be a Universalist?” by Gregory MacDonald 11/21/06
(한국어 번역: 복음주의자가 보편구원론자가 될 수 있는가?, 댓글 미포함)
아래는 (지금은 없어진) Prosblogion 블로그에 제가 작성했던 관련 게시물들입니다.
- “All” 3/7/11
- “Leads to” 3/11/11
- “Hope and the “Hitler Types”” 5/15/11
그리고 관련된 페이스북 노트(”전체공개“로 설정)도 있습니다.
- “N.T. Wright, Kingdom Come Christianity, and the Focus Problem” 6/1/14
(한국어 번역: N.T. 라이트, 왕국의 도래 기독교, 그리고 초점 문제, 댓글 포함)
3 thoughts on “보편구원론과 성경 – Keith DeR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