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campuspress.yale.edu/keithderose/gott-june-06-2006/
GOTT-June 06, 2006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참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에 대해서
(Hoping that Universalism Is / Will Be True)
Keith DeRose
2006년 6월 6일
번역: christianuniversalism.kr
저의 이전 게시물에 대한 댓글에서 Kevin Corcoran은 보편구원론을 옹호한 후 다음과 같은 말로 댓글을 마무리했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보편구원론에 찬동하지 않습니다.(I am not myself committed to universalism.) 저는 그것이 참이기를 바라며, 심지어 그것이 참이기를 기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이라고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후 몇몇 댓글 작성자들은 그런 입장에 끌린 것 같았습니다. 제 느낌으로는 이 입장은 꽤나 인기 있는 입장이며 점점 더 인기가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K-Cor는 『책과 문화』 (BOOKS & CULTURE) 2005년 5월/6월호에 짧은 글을 실어 자신이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 입장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하지만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지 않거나 적어도 온라인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글을 읽으려면] 적절한 도서관에 가야 할 것 같습니다. (B&C는 여기서는 맛보기로 초반부 일부만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그 글을 추천하는 것을 넘어, 이 글의 목적은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한다”(또는 “보편구원론이 참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이유는 아래에서 설명할 것입니다)고 적절하게 말할 수 있는 여러 입장들을 조금 더 명확히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 희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이들 중 상당수는 (반보편구원론자(anti-universalist)는 아니지만) 비보편구원론자(non-universalist)의 입장을 취합니다. K-Cor와 마찬가지로 이들은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또는 참이 될 것이라고) 믿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보편구원론이 거짓이라고 (또는 거짓이 될 것이라고) 믿지도 않습니다. 이는 K-Cor와 마찬가지로 그들도 이 문제에 대한 성경적 증거가 불명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K-Cor의 B&C 글(또는 적어도 그가 저에게 보낸 초안)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저는 오히려 성경적 증거가 이 문제를 충분히 결정짓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분리주의(separationism)와 보편구원론 모두에 대한 성경적 근거가 있지만, 어느 쪽도 확실한 승자로 증명되지는 않습니다.
저는 보편구원론자입니다. 그 이유는 제가 성경적 증거에 대한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이해에 따르면 보편구원론이 승리합니다. (“분명히?” 글쎄요, 제가 그렇게까지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에 대한 저의 변호(“보편구원론과 성경”)를 시작할 때 저는 보편구원론이 꽤나 분명한 승자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 역시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 참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그것이 참이기를 원하지만 그것이 참이라고 확신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증거가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읽었지만, 그 근거를 의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려 깊은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의심한다는 사실은 당연히 저를 잠시 멈추게 합니다.
K-Cor는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한다고 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고도 썼습니다. 우리가 흔히 “나는 p를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적어도 p가 아니라고 믿는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언어학자들은 이를 “부정 상승”(부정 당김, neg-raising)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저는 K-Cor가 이런 암시조차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믿지도 않고 거짓이라고 믿지도 않는 상태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증거가 이 문제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할 만큼 어느 한 방향으로 강하게 밀어붙인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믿나요? 제가 그렇게 말하고 싶은 유혹에 따라 그냥 믿는다고 말한다면 일이 쉬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저에게는 어려운 일입니다. 저는 그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 편하지 않습니다.
“뭐?! 믿지 않는다고?! 그럼 어떻게 자신을 ‘보편구원론자’라고 부를 수 있지?”
글쎄요, 저는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불편합니다. 저는 믿음이라는 개념이 철학, 종교, 정치 등과 같이 의견 불일치가 매우 흔할 뿐만 아니라 어떤 것이 잘못되었다는 좋은 신호도 아닌 영역에 쉽게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1997-98 NBA 챔피언십에서 어느 팀이 우승했는지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특정 경우에는 *당신* 쪽에서 뭔가 잘못되었습니다: 저는 압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가 결정론과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누군가가 비이성적이거나 특별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비록 우리가 실재론자(realist)라면(저처럼, 그리고 여러분도 그러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이 문제에 대해 잘못된 입장을 취했다고 생각하게 되겠지만요. 이것이 바로 이러한 주제에 관한 논의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이런 경우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입장을 믿나요(believe)? 글쎄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저는 그리 자신하지 못합니다. 저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사안에 대한 철학적(정치적, 종교적 등) 입장을 받아들인다(accept)고 말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합니다. 어떤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만큼이나 불투명하지만, 이 경우의 불투명함은 다른 종류의 불투명함인 것 같습니다. 한 가지 차이점은 받아들임은 의지에 좀 더 영향을 받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증거를 살펴본 결과, 한 방향을 더 많이 가리키고 있는 것 같지만 확실히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결정을 합니다(decide): 증거가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을 받아들여야 할까? 그렇게 할 만큼 증거가 충분히 강력한가? p라는 입장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말하자면 p ‘팀’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네, 그게 제 입장입니다. 그것이 참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하며 팀에 합류할 준비를 했습니다. 저는 그 입장을 옹호하고, 그 입장을 지지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등의 책임을 집니다.
저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논쟁이 있는 사안에 대해 제가 취하는 입장을 받아들이고, 그런 정신으로 보편구원론도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K-Cor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가 “보편구원론에 찬동하지 않는다”(not committed to universalism)고 썼을 때, 그것은 제가 한 방식(그리고 제가 설명하려고 했던 방식)으로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에 매우 가깝게 다가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그 입장[보편구원론]에 찬동하고 있습니다.(I am committed to the position) 그렇다고 해서 제 마음을 절대 바꾸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안정된 입장을 표현한 것입니다. K-Cor는 그런 식으로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거나 거짓이라는 입장에 찬동하지 않습니다. 그는 관련 내용을 읽어보았지만, 그 내용은 어느 쪽의 입장을 취하는 것을 정당화해주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K-Cor의 논문 초고를 인용해서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로 “저는 보이는 대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증거를 다르게 읽습니다. (여기서는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것으로 판단되는 성경적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철학적 근거도 제가 결국 생각하게 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K-Cor도 철학자이므로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그에게도 해당됩니다.) 그리고 저는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이는(accept 것이 적절할 정도로 증거가 강력하다고 본다는 점이 저와 같이 다소 확신이 없는 보편구원론자(somewhat uncertain universalist)와 K-Cor와 같은 “결정하지 않은 자”(undecided)의 핵심적인 차이점인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과는 흥미롭게도 다른 또 다른 입장(적어도 제가 열려 있는 입장)도 있는데,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하는 것이 아닌 참이 되기를 희망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조금 복잡해지니 아래에 fold로 넣어두겠습니다…..
(여기서는 보편구원론에 대한 저의 온라인 변호의 두 번째 부록에서 가져왔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부록을 참조하세요). 어떤 사람이 “미래의 우연적 사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이며, 그 결과 누군가가 미래에 자유롭게 무엇을 할 것인지 또는 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한 명제에는 진리 값이 없다고 믿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입장에 대해 훨씬 더 자세한 설명이 있으면 여러 가지 측면에서 좋겠지만, 현재의 논의에서는 이 정도로 기본적인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온라인에서 보편구원론을 옹호할 때 제가 “열성적 배타주의자”(fervent exclusivist)라고 부르는 사람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즉, “배타주의”(누구든지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입장: 제가 받아들이는 입장)와 “강한 배타주의”(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께서 가능하게 하신 구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의 어떤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는 입장: 제가 받아들이는 또 다른 입장)를 넘어, 그는 구원을 받으려면 그 수용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제가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매력을 느끼는 입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이제 이 사람은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주장이 참도 거짓도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전지하신 하나님조차도 모든 인간이 구원받을지 여부를 알지 못합니다. (전지함(Omniscience)이란 모든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진리 자체가 없다면, 하나님이 여기서 알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이 2+2=86을 알지 “못하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전지성에 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소개하는 입장을 취하는 사람은 “포괄적 예지”(comprehensive foreknowledge)라고 알려진 것을 부인하지만 전지성은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보편구원론은 현재 참도 거짓도 아닙니다. 여기서 누군가가 희망하는 것은 보편구원론자 참이라는 것이 아니라(그것은 참이 아닙니다), 보편구원론이 참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입장의 한 버전을 취하면서도 여전히 좋은 의미에서 보편구원론자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설명한 입장을 취하고 모든 인간이 구원 받을지 여부는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을 대적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 정도로 적습니다. 그렇다면 좋은 의미에서 보편구원론자로 간주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당신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믿고 있으며, 논쟁의 여지가 있는 신학적인 문제에서 우리는 어쨌든 그 수준의 확실성을 넘어서는 것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러한 어려운 질문에 대한 인간의 오류 가능성이라는 일반적인 원인으로 인해 우리는 이 문제나 다른 어려운 문제에 대해 어차피 그 정도 수준의 확실성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구원론을 약간 타협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해당 문제에 대해 (당연히!)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확고하든 잠정적이든) 취하고 있는 이 입장은 모든 사람이 구원 받지는 못할 객관적인 가능성이 (거의 없을 정도로 적지만 여전히)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조차도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방금 설명한 입장의 다른 버전은 보편구원론이 참이 되기를 바라지만 어떤 좋은 의미에서도 “보편구원론자”로 간주 될 수 없는 사람이 취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믿지 않는 사람, 즉 가능성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거나 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불가지론적이기 때문에 구원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의 구원을 희망한다고 스스로를 묘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입장에 끌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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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 kevin | June 06, 2006 at 07:43 PM
저도 보편구원론을 확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참이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참이기를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경전이 보편구원론에 대해 뭐라고 말하든, 왜 우리는 그것을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께 요청하지 말아야 합니까?
결국 어떻게 되든 결정은 하나님께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확실히 보수적인 편에 서 있고 보편구원론이 답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능한 모든 기회에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전체 피조물을 대신하여 그것을 요청하는 것이 저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재 사탄까지 아우르는 수준의 보편구원론에 의문을 제기하는 소설을 집필 중입니다. 오리겐의 보편적 화해의 입장에서 가져온 아주 재미있는 아이디어입니다.
- bruced | June 06, 2006 at 10:42 PM
당신이 여기서 말한 것이 마음에 듭니다. 제가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믿는 이유는 그것이 제가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가 원해서 그렇게 강하게 믿는지도 모르죠. 모르겠어요. 하지만 저는 모든 희망을 그리스도와 십자가가 모든 인류에게 가져다 준 구속에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합니다. 저는 전통 종교를 믿는 데 계속 실패합니다. 저는 그쪽으로는 소질이 없어요. 저는 그리스도가 선지자들이 예언한 분이라는 것을 믿어야 하고, 그분이 하실 일을 하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제 견해가 순진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제가 가진 전부입니다.
- Baggas | June 07, 2006 at 02:14 AM
제 입장도 이 스펙트럼의 어딘가에 있습니다. 보편구원론은 옳다고 느껴지고 그 개념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이 주제에 대한 성경에 근거한 분석은 매우 설득력이 있으며 나는 정말로 믿고 싶지만 …
… 역사적으로 대다수의 기독교인/신학자들이 믿어 왔고 지금도 믿고 있는 것을 거스르기는 어렵습니다.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예외를 제외하면, 정통 교회 전통 전체는 사후에 두 번째 기회가 없는 영구적인 심판과 형벌의 개념을 고수해 왔습니다. 성경은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충분히 명확하지 않지만, 어떤 종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은 매우 분명합니다. 지옥/저주 교리가 그렇게 완전히 근거가 부족하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믿고 전파하도록 허락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종류의 기독교 보편구원론이 진리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기도하지만, 그리고 Keith와 다른 사람들이 제시하는 논증에 매우 설득력을 느끼지만, 그것이 제가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신약성경이 이 문제에 대해 좀 더 결정적으로 말해주었으면 좋았을텐데 하고 아쉬워할 뿐입니다.
- Kevin Corcoran | June 07, 2006 at 09:59 AM
몇 가지 간단한 코멘트. 첫째, 제가 B & C에 기고한 글에는 Keith가 참조한 제 초안에 있던 관련 인용문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을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Keith는 제 글을 정확하게 읽었습니다.
둘째, 저는 Keith가 제시한 믿음과 받아들임의 구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믿음은 제가 의지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난 것으로 보이며, 실제적인 의미에서 “나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받아들이는 입장이나 명제들이 있으며, 저는 그것들을 받아들이거나 제 생각의 그물망에 포함시키고, 그것들을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많은 철학적 입장이 이런 식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 본성에 대한 저의 견해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을까요? 물론이죠.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입장에 대해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방식이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생각. Keith는 미래의 우연적인 사건들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과 관련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견해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아주 짧게 언급했습니다. 이 블로그를 읽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대해 반대되는 직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과 이 문제에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눈 결과,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면 인간의 자유는 궁극적으로 어떤 식으로든 침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매우 소중히 여기시고, 또 매우 높이 평가하신다는 것은 꽤나 명백한 것 같습니다(또는 영적인 삶에서 그 어떤 것만큼이나 명백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는 Keith도 동의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따라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열망에는 모든 것이 동등하다는 전제하에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Keith도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하나님께서 인간 피조물의 자유를 피조물 자체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제가 보기에 하나님께서 다음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 직면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를 잃는 대가로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궁극적인 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의 자유를 (한동안) 빼앗는 것입니다. 저는 사랑하는 부모로서 후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에 대해 엄청난 공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동등하다고 할 때 최선은 아닙니다. 그러나 자녀의 자유를 지켜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녀의 삶을 파괴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모든 것이 동등하지 않으며, 나는 자녀의 궁극적인 선을 자녀의 자유라는 상대적인 선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것이다. 그래서 저는 Keith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반드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자유롭다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매우 현실적인 의미에서 비극적인 일입니다.
Cheers,
Kevin
- Adam | June 07, 2006 at 10:20 AM
이것은 좋은 대화입니다 – 충분히 자주 일어나지 않는 대화입니다. 이 주제에 우리 모두를 참여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추가적인 생각을 읽은 후, 저는 아마도 이 대화와 관련하여 여러분과 같은 “이웃”에 속하게 될 것 같습니다.
엄밀히 말해 철학적/신학적 주제는 아니지만, 저는 무엇보다도 이 분야에 대한 조지 맥도널드의 글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의 “전하지 않은 설교” 외에도 그의 판타지 “릴리스”는 하나님의 사랑과 결국 모든 것을 구속하려는 그분의 열망에 대한 놀랍고 환상적인 탐험입니다.
- Keith DeRose | June 07, 2006 at 11:56 AM
작은 정정 사항 하나. Kevin은 이렇게 썼습니다:
“Keith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견해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고 언급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 견해(“열성적 배타주의”(fervent exclusivism)라고 부르는)에 매력을 느끼며 실제로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제가 “열렬한 양립불가능론”(zealous incompatibilism)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견해와 함께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는 생각에 문제를 일으킵니다. 저는 이 문제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을 스케치하는데, 그 중 하나는 F.E.를 고수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F.E.를 포기하지만 여전히 자유로운 받아들임에 큰 가치를 두는 두 번째 관점을 더 선호합니다. 그래서 저는 F.E.에 매력을 느끼지만, 결국 약간의 압력에 의해 그것을 포기하는 입장으로 기울게 됩니다. 이 점은 정정합니다.
- M. Draft | June 07, 2006 at 01:53 PM
저는 아직도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면 선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Kevin은 몇 가지 비유를 제시했습니다 : 부러진 다리, 질병…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면 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정말 위험을 무릅쓰고 나가야 할까요? 성 바울이 만약 그것이 삶과 죽음이 걸린 문제라고 믿지 않았다면 그가 겪은 모든 일을 겪었을까요? 바울이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이 땅의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죽기까지 바쳤을까요? 제가 다른 종교와 비교했을 때 항상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기독교는 이 생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믿음과 행동은 이 땅에서뿐만 아니라 영원에서도 중요합니다. 지옥이라는 곳이 있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지옥에 간다는 저의 믿음이 틀렸다면 제가 틀린 것이지만, 보편구원론이 사실이라면 결국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보편구원론자가 틀렸다면 어떨까요? 그들이 거짓된 “희망”을 퍼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믿지 않는다면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차라리 그리스도의 지상 교회에서 주어지는 용서와 같은 더 확실한 것을 바라고 믿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요?
아마도 파스칼의 내기가 이 논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내기를 하나님에 대한 믿음 대신 보편구원론에 대한 질문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이 점을 살펴보고 다음과 같이 말해보자: “보편구원론이 맞거나 보편구원론이 틀렸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견해로 기울어야 할까? 이성은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없다. 무한한 혼란이 우리를 분리시킨다. 이 무한한 거리의 저쪽 끝에서 앞면이 나올지 꼬리가 나올지 모르는 동전이 던져지고 있다. 당신은 어디에 베팅하겠는가? 이성은 어느 쪽도 선택하게 할 수 없고, 이성은 어느 쪽도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다…”
보편구원론이 참이기를 희망하거나 참이라고 믿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을 잃게 될까요? 보편구원론이 거짓이라고 믿으면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잃게 될까요?
- Keith DeRose | June 07, 2006 at 02:28 PM
“저는 아직도 보편구원론이 참이라면 선교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글쎄요, 보편구원론이 참이 아니라면 선교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당신이 생각하는 답이 “사람들이 영원한 배제로 고통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같은 대답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편구원론을 옹호하는 웹 페이지의 첫 번째 부록에서 말했듯이, 보편구원론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든, 아니면 나중에 영접하든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형벌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영원한 형벌을 배제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그것이 당신의 대답이고, 사람들이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으면 영원한 배제에 직면할 때만 선교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슬픈 일입니다. 저는 첫 번째 부록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한히 큰 채찍을 맞닥뜨렸을 때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할 강력한 이유나 동기를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참으로 슬픈 일이 될 것입니다.”
- Keith DeRose | June 07, 2006 at 02:42 PM
“아마도 파스칼의 내기가 이 논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그 얘기를 시작하게 하지 마세요! 제가 할 말이 너무 많은 거대한 주제입니다. 하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그리고 어쩌면 난해할 수도 있지만), 파스칼적인 이유로 자신의 믿음을 조작하려는 시도는 극도로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믿으세요. 그것은 당신이 진정으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두려움 때문에) 타산적인 이유로 단지 믿으려고 애쓰고 있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정말 엉망인 상태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
- jon kvanvig | June 07, 2006 at 04:15 PM
Keith, 마지막 댓글과 관련하여 당신이 지지하는 믿음/수용의 구분 범위에 대해 간단히 질문합니다. 당신의 마지막 댓글은 믿음이 어떤 면에서 매우 중요하므로 (두려움이나 다른 동기로 인해)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나쁘다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제가 잘못 해석하고 있는 건가요? 제가 궁금한 것은 어떤 이유로든 믿음이 중요한지, 아니면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는지입니다(다시 말씀드리지만, 어떤 목적으로든 믿음이 필수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 Keith DeRose | June 07, 2006 at 08:31 PM
파스칼과 같은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종종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 즉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자신이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는지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 동기를 부여받습니다. 저는 그 생각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저를 믿는 자는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으리라”와 같은 구절을 근거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절들은 명제에 대한 믿음의 사례는 아닌 것 같습니다(궁극적으로 복잡한 방식으로 명제에 대한 믿음을 포함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앞서 말했듯이 저는 관련 명제에 대한 믿음에 대한 질문이 상당히 곤혹스럽습니다. 저는 “나는 믿습니다, 나의 불신을 용서하소서”라는 식의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는 자신의 믿음을 조작하려는 시도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파스칼적 절차는 진짜 믿음보다는 가짜 믿음을 만들어내는 데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지어 누군가가 가진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진정성을 갖는 것은 중요한데, 이는 자신이 사실이라고 믿는 것이 (다양한 방식으로) 두려움, 타산적인 염려 등에 의해 지배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 Chris King | June 07, 2006 at 10:55 PM
몇 달 전, 저는 친한 친구와 보편구원론에 대해 폭넓은 토론을 나눴습니다. 그는 보편구원론 입장을 취했고 저는 분리주의 입장을 취했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의지, 신의 의지, 신의 속성, 교회 역사, 헬라어 주석 등에 이르기까지 총 120페이지에 달하는 긴 논의를 나눴습니다.
이제 그 대화에서 한 발짝 물러날 시간을 가진 후, 저는 보편구원론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분리주의(요즘 우리가 이것을 그렇게 부른다면)의 유일한 필연성을 주장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전통적인 관점”에서 증거를 보지만, 폰 발타자르가 제시하는 견해, 즉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우리 모두 희망을 가져야 한다는 견해가 마음에 듭니다.
Chris
- M. Draft | June 08, 2006 at 03:43 PM
“보편구원론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영접하든 … 상관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정말인가요? 형벌이 영원하지 않다면 저는 사람들이 이생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거나 심지어 받아들이기를 원해야 할 이유도 (정해지지 않은 기간의 형벌에서 일찍 벗어나는 것 외에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 Keith DeRose | June 08, 2006 at 05:46 PM
글쎄요, 이전 댓글에서 말했듯이 저는 그것이 매우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피할 수 있을 때만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경이로움을 빼앗는 것처럼 보입니다.
- Dave | July 20, 2006 at 11:46 PM
Corcoran 박사님,
저는 당신이 보편구원론에 대해 무엇이 가장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그것이 참이기를 바라는 대신에 그것 (즉, 보편구원론)이 참이라고 믿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