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저 올슨: “칼빈주의는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진다” – Gods Love Wins

출처: https://mercyonall.org/posts/calvinism-leads-to-universalism (2019년 10월 26일)
원출처: https://godslovewins.com/blog/does-calvinism-lead-to-universalism/ (2012년 6월 14일)


칼빈주의는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진다

Gods Love Wins

좋습니다, 어쩌면 모든 칼빈주의자가 보편구원론자가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칼빈주의가 무조건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주요 보편구원론 신학자들은 개혁주의자이거나 개혁주의자였으며 그들이 받아들이던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칼빈주의적 개념이 결국 보편구원론을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고 믿었습니다…….. 슐라이어마허, 바르트.

바르트는 칼빈주의가 하나님의 본성으로서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칼빈주의의 내적 논리는 반드시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올바르게 보았습니다.

칼빈주의자가 보편구원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지옥으로 정죄하는 도덕적 괴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충분한 계시이기 때문에 지옥이 전혀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옥은 쓸모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불의한 것이 됩니다.

저는 가끔 제가 보편구원론자가 될 수 있다면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글쎄요, 여전히 인간의 책임에 대한 고민은 안고 있겠죠. 그러나 제 요점은 사랑의 하나님이 왜 어떤 사람들을 영원히 멸망하도록 허용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유 의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르트가 믿었던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무조건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저는 칼빈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내가 칼빈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의 신이 도덕적 괴물이라면 기독교인이 될 이유가 없고, 따라서 칼빈주의자가 되려면 지옥에 관한 성경의 모든 내용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 로저 올슨(Roger Olson). 침례교 목사, 신학교 교수

(로저 올슨의 글 ‘칼빈주의는 보편구원론으로 이어진다'(원문, 번역본)에서 발췌)

올슨의 말은 매우 강렬합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로서 인간의 자유의지를 믿는 그는 약 70%의 복음주의자들을 대표합니다(Barna). 올슨은 정말로 그의 개혁주의 형제, 자매들이 도덕적 괴물에게 예배한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가 말한 것을 이해하셨습니까?

“칼빈주의자가 보편구원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을 자신이 구원할 수 있는 사람들을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지옥으로 정죄하는 도덕적 괴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저는 30년 넘게 5포인트 칼빈주의자(five-point Calvinist, 칼빈주의 5대 강령을 모두 받아들이는 칼빈주의자)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글에서 썼듯이 저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처럼 들리는 말을 했습니다. 세 번째 강령인 제한 속죄를 일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것은 저의 구속받은 본능과 직관에 계속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새겨주신 정의감에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부분 긴장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우리 칼빈주의자들이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그 긴장과 모순을 우리는 “위대한 신비”라고 이름을 바꿔서 불렀습니다.

저는 어떻게 대처했을까요? 많은 경우 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구원의 빛을 결코 보지 못하고 죄와 형벌 속에서 영원히 몸부림칠 운명에 처한 수십억의 사람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웠고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제야 인정할 수 있는 논리적 함축은 하나님을 올슨이 말하는 “도덕적 괴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점까지 저는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고 믿었고, 교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논리적 함축을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저를 “저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는 그의 최근 저서인 『명확한 복음』(The Explicit Gospel)1에서, 지옥은 “하나님의 이름을 경시하는” 것에 대한 형벌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경시하는 주된 방법은 영원한 지옥에 대한 하나님의 윤리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이것은 진실한 칼빈주의자가 교리를 검토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캐치 22(역주: 문제의 본성상 해결이 불가능한 상황. 여기에서는 믿어도 저주받고 믿지 않아도 저주받는다고 느끼는 상황)에 빠지게 만듭니다…!

놀랍게도 인간의 정신은 “인지 부조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우 창의적이 될 수 있습니다. 때때로 저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예: “구원받지 못한 자”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선과 악의 대비를 만들기 위한 우주적 소품의 세계 안에 살고 있다). 저는 이런 불안감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변증학에 관한 수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영원한 지옥에 대한 매우 성경적인 설명, 예를 들어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는 C. S. 루이스의 추측을 받아들일 때가 많았습니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고, 끝까지 성공적인 반역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또는 영원한 지옥에 있는 사람들이 인간 이하의 존재, 심지어 짐승과 같은 존재로 전락한다는 N. T. 라이트의 묘사를 받아들인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저는 근본적으로 신은 선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신의 피조물인 우리 자신은 선이나 사랑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추론에 도달하곤 했습니다. 저는 “시냇물은 그 근원보다 더 높이 흐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는 우리가 창조주보다 더 높은 선과 정의감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번 저는 그 정도 생각에 만족하고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선하시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막연한 대처 방법일 뿐 “우리 안에 있는 희망에 대한 이유를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작은 개인적 세계에서의 흔들리는 확신을 넘어서는 이유도 희망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인생의 여정이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 많은 수수께끼(mysteries)를 가져올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끝, 요점, 로고스는 선하다는 희망을 주기를 원하신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이 선하시며, 따라서 그분의 목표는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것”이라는 사실에 있어야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던지고 있는 근본적인 질문은 놀랍게도 유대-기독교 신앙의 근간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라는 생각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질문은 지극히 진단적인 질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가, 아니면 두 분인가? 그분의 목적은 하나인가, 아니면 둘인가? 그분의 정의의 목적은 하나인가 아니면 둘인가? 그분은 한편으로는 어떻게든 사랑하고 구속하는 정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죄인이 무한히 더 많은 죄를 짓게 함으로써) 죄인을 영원히 벌해야 하는 정의로 나뉘는 것일까요? 우리는 궁금합니다: 그분은 정말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신 걸까요? 피터 하이트(Peter Hiett)가 지적했듯이, 신뢰를 약화시키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자신이 믿고 있는 사람이 자신에 대해 한 마음이 아니라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의 자녀들은 항상 이러한 ‘이중인격’의 공포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저는 올슨이 일부 사람들이 “칼빈주의의 어두운 면”이라고 부르는 결함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믿으며, 유일한 해답은 칼빈주의자가 아르미니우스주의의 핵심(the heart of Arminianism), 즉 하나님이 그의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고 그것을 구속하기를 열망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복음주의 교회 전체가 기독교 보편구원론의 세계관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나타내는 많은 지표 중 하나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와 칼빈주의자 사이의 이 화해될 수 없는 긴장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godslovewins.com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은 두 입장의 핵심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서로 보완적으로 작용하여 “모든 슬픈 것이 거짓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이야기의 완전한 비전으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까지 그들은 함께 예배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인터넷이 그들을 가깝게 만들었으므로 이제 그들은 곧 서로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칼빈주의자가 “도덕적 괴물인 신”을 숭배하는 냉혹한 인간처럼 들리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의 보편적 사랑과 속죄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주의의 언어를 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우리는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이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는 명백한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주권과 그분이 세상을 어떻게 책임지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구원해 달라고 그분의 영을 부르며 무릎을 꿇는 “실천적 칼빈주의자”가 됩니다.

이것은, 제가 희망하기로는, 우리가 서로의 핵심 교리를 포용하지 않고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수수께끼입니다: 모든 사람이 구속되고 회복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은혜의 신성한 로맨스를 통해 이를 성취하도록 조율하실 수 있는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

다음 글에서 우리는 선지자들의 이스라엘 이야기와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와 교회를 통해 놀랍게 나타난 신성한 로맨스의 개념을 살펴볼 것입니다.

  1. 번역본: 장혜영 역, 『완전한 복음』, 새물결플러스,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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