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 T. 라이트, 왕국의 도래 기독교, 그리고 초점 문제. – Keith DeRose

미국의 기독교인 철학자이자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Keith DeRose의 페이스북 노트 (N.T. Wright, Kingdom Come Christianity, and the Focus Problem)와 댓글들을 번역한 글입니다. 번역은 계속해서 다듬는 중이니 의미가 불분명하거나 오역이 있는 부분을 지적해주시면 의견 반영해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N. T. 라이트, 왕국의 도래 기독교, 그리고 초점 문제.

Keith Derose (최종수정: 2021년 3월 14일)
(첫 게시: 2014년 6월 2일?)
(번역: https://christianuniversalism.kr/)
(번역 최종 수정: 2023년 11월 23일)

왕국의 도래 기독교

우리가 “왕국의 도래”(Kingdom Come)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주된 목적이 인간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보거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주된 초점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죽은 후에 천국에 갈 사람들의 진영에 포함되도록 하는 데 있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지금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the Kingdom of God)를 가져오기 위해 오신 것이라고 보고,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은 다양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 있다고 보는 종교적 입장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다른 많은 복음주의적 관점들과 비교하면, [죽음 이후의 삶은] 우리의 현재 삶과 더 연속적이어서, 이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단순히 천국에 갈 사람들의 명단을 결정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영구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우주의 “리셋” 버튼을 누르면 이 세상은 폐기되고, 인간의 영혼만 이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옮겨가서 그 이후의 운명은 지상의 삶에서 일어난 일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이 세상은 다가올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며, 그 변화 이전에 일어난 일들의 흔적을 지니게 될 것이라고 봅니다. (복음서 말미에 묘사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몸은 이러한 변화를 예견하는 일종의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하나님 나라로 데려오는 일은 하나님 나라 발전의 중요한 측면 중 하나이긴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초점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관점에 대한 설명은 이 정도로 하겠습니다. 저도 오래 전부터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 관점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저에게는 항상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관점, 그리고 전체적인 신약성경의 관점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 버전의 기독교는 최근 여러 기독교 작가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옹호되어 왔지만, 아마도 그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N.T. 라이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희망에 놀라다』(Surprised by Hope, 한국어 번역본: 『마침내 드러난 하나님 나라』, 양혜원 역, IVP.)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국과 지옥을 궁극적인 질문으로 고집하는 것, 즉 결국 개별 인간에게 궁극적으로 일어날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고집하는 것은 1세기 유대인들이 저지른 실수, 곧 예수와 바울이 모두 지적한 실수와 비슷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의 목적이 모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귀결된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은 이 문제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바울이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복음이 드러낸 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다른 질문에 닿아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어떻게 세상을 구원하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는]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이스라엘 자체를 구원하실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구원이] 모든 것의 요점은 아닌 것입니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도전도 이와 유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인간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인지, 그리고 그 일을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어떻게 자신의 피조물을 구속하고 새롭게 하실 것인지, 그리고 그 과정의 일부로서 인간 자체를 어떻게 구하실 것인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것 그 자체가 모든 것의 요점은 아닐 것입니다. (p. 185)

초점 문제

그러나 개별 사람들을 “구원 받은” 범주에 포함시키는 데 최우선적이고 특별한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러한 초점을 동반하는 경향이 있는 다른 특정 견해를 고려한다면 완벽하게 합리적입니다. 이 [다른 특정] 견해는 개인이 언제 어떻게 그 [구원 받은 자들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범주에 들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견해를 말합니다. 만약 지옥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 잔인하고 끔찍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다가올 삶은 훌륭하다고 믿고, 또한 각 사람이 이 두 가지 종착지 중 어느 곳에 직면하게 될지는 죽기 전에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믿었는지 또는 죽음 전에 삶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믿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초점은 죽음 전에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구원 받은 사람들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엄청나게 긴급한 문제에 맞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유일한 문제여야 하며,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어야 할 정도로 그렇습니다. 따라서 개인 구원에서 더 넓은 “왕국 도래”로 초점을 전환하는 것은 ([그러한 전환이] 필요하다면) 지옥에 대한 견해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별로 설득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왕국 도래에 초점을 맞춘 새 포도주를 특정 낡은 부대에 담아 두려고 하는 사람들은 “초점 문제”라고 부를 수 있는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라이트와 잃어버린 자들의 암울한 운명

그리고 여기서 설명할 이유 때문에 라이트 자신도 그러한 초점 문제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히 라이트는 위에서 제가 왕국 도래 초점과 합리적으로 결합되지 않는 형태의 지옥관의 예로 들었던 것과 같은 잔인하고 끔찍한 지옥을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는 영원한 고문실을 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초점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 위해 지옥에 대한 가장 잔인한(슬프게도 전통적인) 견해까지 갈 필요는 없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 견해를 알고 계신 분들이 이 모든 것이 기독교 보편구원론에 대한 광고라고 의심하기 시작할 경우를 대비해, 초점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쪽 극단으로 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보편구원론 자체가 문제를 해결해주지도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방식대로라면, 기독교 ‘보편구원론’은 모든 인간이 적어도 궁극적으로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입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는 엄청나게 끔찍하고 (영원하지 않은 한) 엄청나게 긴 사후 형벌을 포함하는 견해와 양립합니다. 따라서 [엄청나게 끔찍하고 긴 형벌을 포함하는] 이러한 형태의 보편구원론 관점들을 왕국의 도래 견해와 결합하려고 시도할 경우 초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이제 『희망에 놀라다』에 등장하는 라이트의 견해를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이 견해는 희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저를 놀라게 했지만, 제가 희망에 대한 모든 것에 얼마나 깊이 천착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라이트에게 공정하게 말하자면, 가장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그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는 태도(정신, spirit)입니다.

제가 결코 원하지 않는 것은 누군가가 제가(또는 다른 사람이) 이 모든 것에 대해 아주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제가 이런 방식으로 사변적인 추측을 즐긴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약 성경과 이 세상의 차가운 현실 때문에 가장 어두운 신학적 신비 중 하나에 대해 이런 종류의 해결책을 찾게 되었습니다. 제가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다면 저는 기쁠 것입니다. . . (p. 183)

그래서 저는 그의 견해를 그가 제시하는 취지에서 받아들이고, 여기서 라이트가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결국 도달하는 곳은 단지 암울할 뿐만 아니라, 그에게 불쾌한 “초점 문제”를 안겨주는 방식으로 암울할 수 있다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의 견해를 따른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더 넓은 “왕국 도래” 접근 방식을 취하기보다는 잃어버린 자의 상태를 되돌리는 데 아주 유별나게 집중하는 것이 타당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그가 틀렸다는 “증명”이 되지는 않더라도 여전히 그에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라이트는 매우 잔인한 형태의 지옥을 묘사하지는 않지만 그가 잃어버린 자에게 부여하는 운명은 상당히 암울해 보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고문당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지만, 인간 이하의 상태로 퇴화되어 영원히 남아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이트는 다음과 같이 제안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이 아닌 것에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고 예배할 때, 그들은 점차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을 중단합니다. (p. 182)

그는 이어서 말합니다.

제가 제안하는 것은 인간이 계속해서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소식의 모든 속삭임, 참된 빛의 모든 희미한 반짝임, 돌이켜 다른 길로 가라는 모든 촉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이정표를 거부하고, 죽음 후에는 마침내 자기 스스로의 실질적인 선택으로 한때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 신의 형상을 전혀 지니지 않은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p. 182)

라이트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잃어버린 자(지금은 분명히 회복 할 수 없도록 잃어버린 자)들은

희망의 범위를 넘어설 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정의 범위를 넘어서게 됩니다. (p. 182)

라는 인상적인 말을 합니다.

글쎄요, 이것은 제가 평소에 듣던 일반적인 기독교적 견해와는 조금 다릅니다. [저는 그 이면에 천국에 있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자들에 대해 안타까워할 필요가 없는 그림을 그리려는 바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희망의 범위 너머’에 있는 사람들은 ‘동정의 범위 너머’에 있는 사람들, 즉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인간 이하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는 소멸주의의 ‘장점’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영원한 형벌을 수용하려는 시도입니다. 소멸론자들은 잃어버린 자들을 없애는 것이 영원한 고통의 관점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구원 받은 자들이 안타까워할 잃어버린 자들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라이트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잠깐만요, 영원한 형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잃어버린 자들을 계속 존재하게 하되, 동정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의 지위를 낮추면 어떨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케이크 {주여, 영원한 형벌을 “케이크”로!}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다(역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이 안타까워할 필요 없는 방식으로 잃어버린 자들에게 영원한 형벌을! 만약 이것이 여기서 생각하는 것이라면, 저는 이것이 실패라고 판단합니다. 소멸주의는 애초에 여기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구원 받지 못한 부모, 자녀 또는 기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를 완전히 멈췄더라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안타까운 감정을 느낄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천국에서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면, 영원한 형벌 견해와 마찬가지로, 구원 받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나 일어나는 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 되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과거 또는 현재 상태에 대한 사실에 대해 무지해야 합니다. 구원 받은 자의 눈물에만 주목하더라도 슬픈 사실을 애써 덮어버려야만 모든 눈물을 닦아낼 수 있습니다. 라이트의 관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순간의 상태만 고려한다면 우리가 동료 인간에게 가질 만한 태도의 적절한 대상이 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해도, 우리는 한때 그저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존재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여전히 안타깝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목적에 중요한 것은 잃어버린 자들의 운명에 대한 라이트의 설명이 영원한 고문실과 같은 수준의 암울함은 아니더라도 꽤 암울하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자들의 운명이 암울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초점 문제를 피하는 관점들

그러나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자들에게 암울한 운명을 부여한다고 해서 그 자체로 왕국의 도래 관점 지지자가 나쁜 초점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돌이킬 수 없는 잃어버린 자들의 궁극적 운명에 대해 라이트와 동의하거나, (암울한 소멸론이 인기를 얻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잃어버린 자들이 궁극적으로 소멸한다고 생각하는 견해를 고려하여 무엇이 초점 문제를 일으키는지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리고 또한 잃어버린 자들이 어떻게 그들의 운명에 이르게 되는지 설명하는 데 있어 “그들 자신의 실질적인 선택”의 역할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라이트와 함께 하면서도,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왕국 도래 접근 방식과 결합될 때 초점 문제를 꽤 잘 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견해를 고려해 봅시다.

실제로 이 관점은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잃어버리게 될 자의 자유 또는 자율성 및/또는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대한 그들 스스로의 책임을 존중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라이트와 같은 관점의 자연스러운 종착지인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길을 잃은 개인의 선택에 많은 것이 달려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선택이 정확히 어떤 형태로 이루어질지, 즉 어떤 선택지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당사자에게 어떻게 제시될지에 대해서는 현재로서는 열어두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좋은 소식의 속삭임”, “참된 빛의 희미한 반짝임”, “돌이켜서 다른 길로 가라는 촉구”에 따르거나 반대하는 몇 가지 중요한 선택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에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무엇이든(그리고 충분히 잘 선택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사이의 경계가 어디에 있든), 이 세상에서 우리 인간은 종종 매우 열악한 상황, 즉 나쁜 선택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에서 이러한 선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종종 C.S. 루이스(라이트가 어느 정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어쨌든 “지옥의 문은 안쪽에 잠겨 있다”(626))라는 인상적인 문구로 자신이 지지하는 입장을 표현했던 사람)가 강조했듯이, 우리가 기쁨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다양한 악덕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러한 악덕에 도달합니다. 어떤 사람들은(예를 들어, 악한 부모 밑에서 태어날 때부터 매우 학대받으며 자란 사람들) 기회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중 다른 사람들은 훨씬 더 쉽게 그것을 얻습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나 외부의 힘으로 인해 ‘반대를 선택하는’ 범주에 꽤 확고하게 속하게 되었지만,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우리가 거부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환경에서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여기서 사울의 회심을 떠올려 보세요). 그러나 적어도 이생에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하시지는 않으시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훨씬 더 미묘한 “좋은 소식의 속삭임”을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사람들은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터무니없이 쉽지는 않은 상황, 심지어는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올바른 선택이 가져다주는 특별한 가치가 있다는 (저는 꽤 그럴듯하다고 확신하는)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매우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하나님이 신경 쓰시는 유일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뿐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우리에게 극도로 쉬운 선택이더라도(어쩌면 잘못하기 매우 어려운 선택일지라도) 하나님께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우리가 선택에 있어서 훨씬 더 나은 타율을 얻으실 수 있는 환경을 심지어 저조차도 생각해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불경스럽지 않기를 바랍니다(확실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사실인 것 같으니까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일([그런 환경을 쉽게 생각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심할 여지없이 현명하게도 Keith의 터무니없이 쉬운 환경 계획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실제 선택에 의해 어떤 위대한 가치가 실현되었다고 가정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은혜롭게 일하시고, 종종 매우 힘든 상황에서 우리를 앞으로 부르시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런 길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그 선택은 예상대로 이 세상에서 많은 나쁜 인간적 선택을 초래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시지만 또한 그들이 자유롭게 선택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을까요? 소수(아마도 극소수)의 구원 받은 사람? 충분히 좋은 선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낮은(아마도 매우 낮은) 기준? 그리고 우리가 여러 가지 틀에 갇혀 잘못된 길로 향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오랫동안 잃어버린 자를 찾고 계시고, 어느 시점에서 그들을 포기하실까요?

저로서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매우 낮은 기준의 길을 택하셔서, 예를 들어 하나님을 결코 명시적으로 선택하지는 않지만 (그리고 어쩌면 하나님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면 심지어 반항하는 일을 할 수도 있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미세한 “좋은 소식의 속삭임”에 부합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 만족하실 것이라고는 믿기 어렵습니다. (“음, 그는 나를 위해 일종의 선택 같은 것을 했어. 생각해보면 정말 좋은 선택이었지. [그가] 불행한 상황[에 처할수도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도 그렇지만 우리를 위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알면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으로 선택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언제 하나님이 잃어버린 개인을 포기하시는지에 관해 비기독교적이거나 비성경적이라고 생각되지 않기를 바라는 제 자신의 확신은, 하나님은 예수님의 유명한 비유에서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는 것만큼 오랫동안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찾을 때까지.” 하지만 저는 약합니다. 그리고 제 견해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정말 모든 것을 시도했지만, 잃어버린 양이 길을 잃은 채로 남아 있기를 고집해서 강제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이 양들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정도라면, 인간의 자율성을 사랑하시는 기독교 하나님은 결국, 루이스가 하나님의 입에 넣은 (그리고 라이트가 동의하며 인용한 (SBH, 180)) 인상적인 선언에서처럼, 마침내 일부 끈질긴 나쁜 선택자들을 포기하면서 그들에게 “너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선언하실 수 있다는 생각은 확실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오는 견해는 『지옥의 문제』(The Problem of Hell)에서의 조나단 크반빅(Jonathan Kvanvig)의 입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길을 잃은 채로 남아 있기를 선택한 사람들을 포기하시지만, 그것은 그들이 신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명확하고 견고한 선택을 한 후에, 그래서 그것이 그들의 최종 선택으로 합당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상황에서, 그리고 반전을 위한 유일한 희망은 그들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을 수반하는 경우에만 이루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생에서 하나님을 믿거나 거부하는 최종적인 선택을 그런 식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들이 죽더라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궁극적으로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하나님을 반대하는(크반빅의 버전에서는 비존재를 명백히 선호하는) 최종 선택을 한 사람들은 소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마지막 부분은 라이트의 관점을 따르는 동기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라이트와 같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는데, 궁극적으로 길을 잃은 자들이 그 자신의 명확한 선택에 의해 “희망도 동정도 없는” 어떤 비인간적인 상태로 하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초점 문제에 대해 걱정하기 훨씬 전부터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개인이 어떻게 암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 자율성에 기반해서 할 수 있는 그럴듯한 설명 방법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최종적으로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부여되는 암울한 운명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초점 문제를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하나님의 대변혁(God’s great transformation)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이 시대에 적합한 방식으로 왕국을 건설하는 데 집중할 수 있습니다. 왕국 건설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을 왕국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은 필요한 경우 매우 좋은 상황에서 선택을 하게 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왕국으로 인도하도록 돕는 역할을 하도록 허락하시며, 이 세상에서 종종 열악한 상황에서도 그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의 특별한 가치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우리를 통해 은혜롭게 일하시며 하나님의 왕국을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는 방식과 일치합니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을 왕국으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최우선적인 초점이 될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좋은 환경에서 선택할 기회를 얻지 못해서 영원히 배제될 위험을 직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원히 배제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 슬픈 삶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에서 스스로의 밝아진 눈과 냉철한 머리로 한 선택에 의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왕국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들이 지금 왕국에 들어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왕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 특권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초점]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라이트와 초점 문제

하지만 라이트는 하나님이 구원하기 원하시는 사람들이 어떻게 결국 암울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지에 대해 자유 의지를 통한 설명이 가장 자연스럽게 취할 수 있는 방향을 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루이스식 설명의 옹호자들 중에 라이트만이 이런 접근을 취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기회에 다루어야 할 보다 일반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라이트는 그가 취하는 방향 때문에 지독한 초점 문제에 시달릴 위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라이트의 견해와 위에서 설명한 크반빅의 견해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은 하나님이 잃어버린 양을 (양이 잃어버린 채로 있는 동안) 얼마나 끈질기게 찾는가 하는 점입니다. 라이트의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또는 양을 찾았거나 양이 하나님에 반하는 최종 선택을 한 것이 충분히 분명해질 때까지가 아니라 죽음의 시점까지만 찾는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약한 사람이라 그런지 “오, 죽음아, 이제 네 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바울의 조롱에 대해 죽음이 그렇게 좋은 반박을 하게 두는 것이 매우 불편합니다: “내 침? 바로 저기 있지. 하나님이 사랑하고 구원하고 싶었지만 내가 영원히 기회를 끝내버린 저 사람 보이지?” 이런!) 다시 라이트의 암울한 말로 돌아가서, 이제 잃어버린 자의 기회가 언제 끝나는지에 대한 구체적 언급을 (강조를 추가하여) 포함시켜 보겠습니다:

저의 제안은 인간이 이 길을 계속 따라갈 수 있고, 그래서 좋은 소식의 모든 속삭임, 참된 빛의 모든 희미한 반짝임, 돌아서서 다른 길로 가라는 모든 촉구,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모든 이정표를 거부하고, 죽음 후에 마침내 자신의 실질적인 선택에 의해 한때 인간이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은 존재, 신성한 형상을 전혀 지니지 않은 피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선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하나님의 선한 세상에 살았던 육체의 죽음과 함께 그들은 희망 너머뿐만 아니라 동정 너머로도 동시에 넘어갑니다. 아름다운 교외에는 강제 수용소가 없고, 기쁨의 궁전에는 고문실이 없습니다. 더 이상 어떤 의미에서든 조물주를 반영하지 않고 여전히 [한때 인간이었던] 전-인간 상태로 존재하는 피조물은 더 이상 상습적인 범죄자에게조차도 느낄 자연스러운 동정심조차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없습니다. (SBH 182-3)

이것은 많은 것을 대답하지 않고 남깁니다. 저는 누군가가 라이트가 잃어버린 자에게 부여하는 암울한 운명을 피하려면 이생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즉 경계선이 어디에 그어지는지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라이트의 관점에서는 지독한 초점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의 원인이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자의 운명이 암울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실, 라이트가 묘사한 그들의 운명은 암울한 것이 사실이지만, 궁극적으로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대한 기독교의 여러 묘사들 중에서 특별히 더 암울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경쟁을 고려해보십시오.) 여기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잃어버린 자의 운명에 대한 충분히 암울한 설명(소멸론과 라이트의 견해 모두 충분히 암울해 보입니다)과 더불어,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가 죽을 때 모든 제안을 철회하는 라이트의 하나님이 만든 급박하게 똑딱이는 시계입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라이트의 견해에 따르면, 사람들이 죽어서 영원히 배제되기 전에 구원 받은 자의 명단에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운명이 걸린 선택을 하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는 데에 특별하고 급박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는 것은 완전히 무자비하고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댓글

Eric Schliesser (2014년 6월 2일)

어디에서 제가 Keith 버전의 “희망에 대한 모든 것들”에 대해 배울 수 있을까요?

Keith DeRose (201462)

좋은 곳이 없을지도 몰라요, Eric. 이건 좀 부정적인 내용인데요: 저는 그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에 희망에 집착합니다. 종교에 있어서는 저는 확실히 어떤 실질적인 것도 알지 못합니다:

http://prosblogion.ektopos.com/2013/07/12/gods_existence/

그리고 저는 정말로 믿지도 않는 것 같아요: 이것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은 저의 다른 철학적 입장에 대한 저의 태도에 대해 제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https://www.facebook.com/notes/keith-derose/some-brief-half-baked-thoughts-about-knowledge-belief-and-assertion-in-philosoph/10150406080404991

신앙? 글쎄요, 그것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산을 많이 옮기지 못했거든요. 그리고 예를 들어 동생의 죽음으로 신앙의 위기를 겪었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보통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요, 하지만 그건 대부분 ‘Positively 4th Street'(역주: 밥 딜런의 노래 제목)의 이유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희망은 꽤나 쉬운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것이 제가 가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제가 무엇이든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버전입니다. 저는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http://pantheon.yale.edu/~kd47/univ.htm

그리고 hope for that은 제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저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옳더라도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의 첫 번째 링크 참조], 단지 행복한 버전의 하나님 이야기가 옳기를 바랄 뿐입니다; 저는 행복한 버전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유일한 버전이라고 생각하지만 기껏해야 어떤 버전이든 진실이기를 바랄 수 있을 뿐입니다 [& 직면합시다: 대부분의 인류가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는 기독교 이야기의 가장 대중적인 버전은 매우 나쁜 소식에 해당하므로 반대를 희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우리는 결국 같은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화가 나는 것은 희망마저 없애버리고 싶어 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http://prosblogion.ektopos.com/2011/05/06/hoping_all_will/

http://prosblogion.ektopos.com/2011/05/07/hoping_all_will_1/

http://prosblogion.ektopos.com/2011/05/10/hoping_all_will_2/

http://prosblogion.ektopos.com/2011/05/15/hoping_all_will_3/

Keith DeRose (201463)

희망이 없다는 것에 자주 놀라고 (그리고 악화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Dave Huth (201463)

“하지만 저는 약합니다.” – 이 게시물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실제로 제게 더 많은 희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생명, 별, 농담, 그리고 진실한 다른 멋진 것들처럼 소멸되거나 만들어지고 퍼질 수 있는 희망의 능력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야기의 기초로서 저에게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Steven Kurtz (201463)

부활은 자동적인 현상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입니까? 어쨌든 사람들은 어떻게 지옥에 갈까요? 아마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아니겠죠?

Keith DeRose (20141219)

이 문제(잃어버린 자의 운명)를 포함하여 여러 문제에서,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라이트의 입장을 이해하게 하는 방법은 성공회 신자라는 그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를 본질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자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를 상대적으로 (다른 복음주의자들에 비해) 긴 사슬에 매인 복음주의자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잃어버린 자를 위한 영원한 의식적 고통에 집착할 정도로 그의 사슬은 그렇게 짧지 않습니다. 매우 짧은 사슬에 익숙한 복음주의자들에게는 라이트가 약간 날카롭고 흥미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슬은 확실히 보편구원론은커녕 소멸주의를 허용 할 만큼도 충분히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슬의 길이를 넘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것은 그가 무엇에 묶여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묶여있는 것은 표준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그는 그것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만 가능합니다. 경전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는 곳에서는 아주 멀리 벗어날 수 있지만, (성경에 근거하든 그렇지 않든) 확고한 곳에서는 사슬의 길이만큼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Keith DeRose (20141219)

이것은 하나의 문제일 뿐이지만 좋은 사례입니다. 저는 특정 구절에 대한 특정 접근 방식이 어떻게 사람을 소멸주의자 또는 보편구원론자로 만들거나 ECT로 만드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 구절에 대한 어떤 접근 방식이 라이트의 입장을 취하게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라이트는 어떤 구절을 통해 그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으며, 어떻게 그런 견해를 제시하고 있습니까? 저는 그를 그런 방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표준 ECT 복음주의 가르침에서 약간 벗어날 수 있지만 너무 멀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그가 그 지점에서 끝내는 것이 완벽하게 이해가 됩니다.

Keith DeRose (20141219)

구원받지 못한 자의 운명에 대한 라이트의 입장의 적절한 명칭이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비인간주의(Inhumanism)?

탈인간주의(Dehumanism)?

John Schneider (20141219)

아마도 “비인간주의”(non-humanism).

John Schneider (20141219)

Keith DeRose는 이렇게 썼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슬은 확실히 보편구원론은커녕 소멸주의를 허용 할 만큼도 충분히 길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슬의 길이를 넘어 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다른 것은 그가 무엇에 묶여 있는지 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묶여있는 것은 표준 복음주의 신학입니다. 그는 그것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만 가능합니다. 경전에서 많이 벗어나는 것이 허용되는 곳에서는 아주 멀리 벗어날 수 있지만, (성경에 근거하든 그렇지 않든) 확고한 곳에서는 사슬의 길이만큼만 벗어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라이트가 랍 벨이 저지른 ‘실수’를 의식적으로 피한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그렇게 해야 사람들이 그의 다른 모든 주장에 관심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주의자들이 기독교가 그럴듯해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지적인 움직임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John Schneider (20141219)

그는 또한 어느 정도 성경에 묶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본문의 노골적인 모순을 강조하는 것을 피하고 “다른” 설명에 대한 “유대인”의 관용이라는 개념을 밀어붙입니다.

John Schneider (20141219)

Keith DeRose: 언제든 라이트보다 제임스 바(James Barr)를 주세요. 바를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윌리엄 J. (빌리) 아브라함(William J. (Billy) Abraham)도요.

Keith DeRose (20141217)

아니면 “하위인간주의(subhumanism)?

Peter Grice (20141219)

rethinkinghell.com에서 우리는 라이트의 견해를 비인간화(인간성말살, Dehumanization)로 분류합니다. 인간 인격의 점진적인 소멸. 그 전통주의자의 사슬은 신성한 고용주에게까지 울려 퍼지고, 이 짐승 새끼가 튀어 나옵니다!

확실히 창의적이지만 궁극적으로 더 이상 자신을 느끼지 못하는 한때 인간이었던 짐승이 어떻게 처벌을 받을 수 있는지는 매우 궁금합니다.

라이트는 물론 여러 구절에서 자신의 견해를 도출합니다. 비록 C.S. 루이스는 아직 성경 정경의 일부가 아니지만…

Keith DeRose (20141220)

만약 라이트에게 이 슬픈 과정이 우리의 죽음으로 완성되는 것이라면, 적어도 많은 경우에 이것은 매우 갑작스러운 비인간화, 즉 여전히 활활 타오르던 불꽃에 급하게 물을 끼얹는 것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물론 올바른 선택을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선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지 않은 하나님의 선한 세상에 살던 육체가 죽으면서 그들은 희망과 동정을 동시에 넘어서게 됩니다.”

John Schneider (20141220)

저는 차라리 “절멸”(exterminatio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도덕적으로 좋은 말이네요.

John Schneider (20141220)

C.S. 루이스의 하나님은 제 생각엔 꽤 형편없는 치료사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분은 상담을 할 조력자들을 보내셨지 오캔맨은 보내지 않으셨어요(외국인들을 위해 참고로 말씀드리면, 오캔맨은 개미와 흰개미 등 귀찮은 해충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Peter Grice (20141220)

갑작스러움에 대해 당신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Keith. 그 책을 읽은 지 오래되었지만 관련 구절을 확인했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또한 라이트가 탈인간화(dehumanization)라는 용어와 “궁극적인 탈인간화”(ultimate dehumanization)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 점진성은 죽음 이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착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육체적 부활에 대해 많이 말하지 않는데, 이는 육체적 부활에 대한 그의 강조를 감안할 때 다소 아이러니합니다. 그래서 저는 한때 인간이었던 존재가 그의 견해에서 육체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그들이 어떤 몸으로 부활하는 것을 상상하는지 궁금합니다.

Keith DeRose (20141220)

어쩌면 도룡뇽(newt)의 몸일 겁니다.

Peter Grice (20141220)

그럼 그가 그것을 책에 쓰지 않은 것도 당연하죠…

Kim Healy (2016117)

신이 가짜 증거(예를 들어, 젊은 지구 창조론이 화석에 대해 가정하는 믿음의 시험)를 조작하거나 영혼으로부터 지식의 조각을 지우도록 요구하는 신관(“모든 눈물은 슬픈 사실을 덮어 버려야만 말릴 수 있다”)은 신을 일종의 인지적 악당으로 만듭니다. ‘폴리에 아 듀'(folie a deux: “두 사람이 공유하는 광기”라는 뜻의 프랑스어. 망상적 믿음이 한 개인에서 다른 개인으로 전염되는 상황을 말한다.)에서 아주 가까스로 탈출하여 성인이 된 저는 (영향을 받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점점 더 좁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 생각이 대부분의 다른 신정론적 시도만큼 자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Keith DeRose (2016117)

문제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문제의 입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암울한 궁극적 운명을 겪게 될 것이라고 보는 모든 입장들이 포함되므로, 소멸이 충분히 암울하다고 할 때, 대다수의 기독교인이 여기에 포함됩니다.)은 구원 받은 자의 슬픔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에 대해 다를 수 있으며, 일부는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버리는 일종의 망각에 호소할 수 있지만, 저는 대부분이 모든 눈물이 마를 것이라는 것을 저(그리고 당신)만큼 진지한 방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것을 구원 받은 자의 슬픔까지 생각하기 전에도 이미 그 견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의 마르지 않은 눈물도 충분히 문제가 되고 위대한 약속을 거짓말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Kim Healy (2016117)

저는 영원한 운명보다는 눈물의 원인(“잃어버린 자”와 “구원 받은 자”에 대한)에 점점 더 많은 중보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거나 내세에 대한 충분한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회복”은 유대인의 관용구이지만 복음서에 나오는 수많은 치유 이야기를 고려할 때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의 최우선 순위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나인의 청년은 부활하여 더 이상 슬퍼하지 않는 어머니에게 돌아갔는데, 그렇게 하는 것의 상징적 가치에 대한 별다른 이야기 없이 그랬습니다. 마치 그녀의 개인적이고 실질적인 상실이 실제로 그 자체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요. (특히 저는 가끔 마르다가 나사로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동안 예수님이 고상한 주님 놀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닌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2 thoughts on “N. T. 라이트, 왕국의 도래 기독교, 그리고 초점 문제. – Keith DeRo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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