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 교리와 철학자들의 하나님 – Megan Fritts

출처: https://mercyonall.org/posts/the-doctrine-of-hell-and-the-god-of-the-philosophers (MercyOnAll)


지옥 교리와 철학자들의 하나님
(The Doctrine Of Hell And The God Of The Philosophers)

2020년 5월 18일
MEGAN FRIT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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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이나 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메모리알”(Memorial)의 첫 번째 구절

한 성경 공부 모임에 손님으로 참석한 적이 있는데, 그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는 지옥에 가도록 의지하신다는 사실이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나요?” 이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이것이 함정 질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9절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누구도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얘기를 하면서 그 질문은 함정이었고 제가 질문의 숨은 의도를 파악했다고 확신했습니다. 긴 침묵이 흐른 후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으면 그 구절은 그런 의미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그분을 믿지 않는다면, 네, 그분은 당신이 지옥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저는 어렴풋이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글쎄요, 알았어요. 그렇다면 네, 그건 그분의 선하심을 의심하게 하네요.” 그날 밤 내내 다른 말은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괜히 성가시게 굴고 싶지 않았고, 제가 미리 정해져 있는 답안지대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하자 남편은 짧고 의미심장하게 대답했습니다: “이런. 차라리 철학자들의 신이 낫겠어.”

이 글은 제가 보편구원론자로서 저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첫 번째 글입니다. 하지만 글을 시작하기 전에 제 입장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저는 내세에 대한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정말로 정적주의자(quietist, 주장이나 논쟁을 원치 않는 사람)입니다. 저는 만약 당신이 성경이 내세에 대해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확신한다면, 성경의 다른 책이나 다른 주석서 또는 그 교리에 대한 신학자의 견해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아마 다시 혼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내세에 대한 다른 어떤 주장보다도 영원한 지옥이라는 개념에 대해 훨씬 회의적입니다.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좋은 신학적 논증이 많이 있으며, 그중 많은 것들이 이 블로그(역주: MercyOnAll)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공정하게 말하자면, 영원한 지옥을 지지하는 좋은 논증도 많으며, 내세에 대한 다른 모든 입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저에게는 [보편구원론을 지지하는] 전자의 논증들이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문제에 대해 특별한 기여를 할 만큼 충분히 신학적으로 정통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주제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저는 유신론(또는 적어도 불가지론)을 받아들인 직후에 뒤따르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지옥 교리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사람들이 상정하는 여러 신들 중 어떤 신이 진정한 신인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최소한 나는 왜 기독교가 참된 종교이기를 희망해야 하는가?

이 주제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수히 많지만, 여기서는 그 중 극히 일부만을 다룰 것입니다. 위 문단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어쩌면 “기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에서 저는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는 그 신을 경배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 자체로)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더 나아가 “기독교는 진리이다”라는 말은 단순히 기독교 신이 존재한다는 것 이상을 의미하며, 그 진리 여부는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에 의존한다는 것을 설득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 두 주장을 통해 지옥에 대한 교리가 철학자들의 신과 비교할 때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상당 부분 빼앗아간다는 저의 생각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철학자들의 신”을 정의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매우 단순합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자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존재(tri-omni being)로서, 어떤 특별한 우월적 위치(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신이 시공간 바깥에 존재한다고 받아들입니다)에서 세상을 다스리는(rules)(어떤 의미에서 “다스린다”는 말은 그가 단지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인접한 원인(proximal cause)이거나 작용인(efficient cause)이거나 목적인(final cause)이라는 의미일 수 있습니다) 존재라는 말입니다. 철학자들의 신은 대부분의 경우 일종의 설명을 위한 장치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우주가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하고, 어떤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제1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따라서 이 제1 원인이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종교적 열정이 넘쳤던 파스칼이 비실재적이라고 느꼈던 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무미건조하고 철학적으로 우아한 신에 대한 개념입니다.

경배 받기 합당한 존재

첫 번째 주장입니다: 기독교의 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곧 이 존재가 경배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경배”받아야 한다“는 말을 명확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신이 존재하든 그 신을 경배해야 하는 도구적인 이유는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즉, 우리는 벌을 받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더 흥미로운 질문은 신이 존재한다고 할 때 그 신이 경배를 받을 만한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고대 히브리 문헌과 기독교 신약성경에서 언급하는 그 존재가 존재한다면 과연 온전히 선한 존재일까요? 이것은 신의 존재에 대한 대부분의 표준적인 논증으로는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대답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알기도 어렵습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과는 다른 도덕적 기준을 신에게 적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합리적입니다. 어떤 행동은 부모가 자녀에게 하는 것은 허용되지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예: 체벌). 마찬가지로,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일이 신에게는 허용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신의 모든 행위를 전면적으로 변호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으며, 기독교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종종 실제로 존재하거나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수많은 이슬람 교리에 대한 도덕적 평가를 바탕으로 이슬람교를 비판합니다. 만약 인간에게 신과 같은 존재의 도덕성을 올바르게 평가할 능력이 정말로 없다면, 다른 종교의 관행에 대한 이러한 비판은 무력화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허용되는 행위가 다른 사람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경우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도덕적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의 생각으로 신이 하는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수 없는 위치에 신을 올려놓는다면, 즉 우리가 신이 하는 모든 일을 ”선“으로 규정해야만 한다면, 우리는 (일관적으로 사고한다면) 깊은 도덕적 회의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이라고 말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입장에서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의 분실된 사본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 사본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돈을 받고 아이들을 성노예로 파는 것이 교회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돈을 버는 좋은 방법이며 도덕적으로 허용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사본이 상당히 오래되었고 다른 모든 면에서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혐오스러운 내용 때문에 그것의 정통성을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꽤 자신감을 갖고 편안하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우리가 스스로 예배할 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전혀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

두 번째 주장, 즉 “기독교는 진리이다”라는 말이 단순히 “성경에서 언급되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라는 말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정할 것입니다. 만약 우리 모두가 마지막 때에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하나님은 존재하지만 그들[기독교인들]이 다른 모든 면에서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도 “기독교는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불편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올바른 하나님을 말하더라도 거짓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잘못 가르칠 수도 있고, 역사적 사실을 말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허구만을 말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잘못 말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여기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마지막 가능성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말하는 것에 근거해 볼 때, 기독교의 하나님은 철학자들의 하나님보다 더 나은가?’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인정하듯이, 기독교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얻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보다 그리스도를 통해 얻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우선시하는 것은 선택적 읽기가 아니라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은 적어도 애초에 하나님이 성육신하신 이유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이전에는 우리에게 감춰져 있었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바라보시고, 우리와 함께 고통받고 기뻐하고 의심하는 아름다운 인간 하나님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 블로그 이름(Mercy on All)이 말하는 바로 그 특징, 즉 자비입니다.

자비는 결국 피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매혹적입니다. 자비는 정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정확성을 위해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이 글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정의”를 고전적 개념이 아닌 현대적 정의 개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 그에 따르면 정의는 도덕적 자격에 따라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과 보상, 고통과 행복이 분배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처벌이나 비난을 하지 않는 등으로 자비를 베풀 때마다 나는 누군가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지 못하게 함으로써 그 결과가 정의롭게 되는 것을 막습니다. 형벌 대속을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비로우시지만 아버지 안에서 정의로우시기 때문에 아버지는 형벌을 내리셔야 하고 아들은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다.” 현대의 정의 개념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이러한 행위가 정의로운 이유는 그가 문자 그대로 우리에게 그의 의로움을 주어서 우리가 (어떤 의미에서) 그의 은혜의 보상을 적절히 받을 자격을 갖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벌을 받아야 할 곳에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은 항상 불의한 일이며, 따라서 하나님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무오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대부분의 대속론 지지자들의 관점에서 볼 때 신학적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는 아버지 하나님이 자비를 베푸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형벌을 받아 마땅한 곳에 반드시 형벌을 내려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33장 19절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내가 나의 모든 선함을 너희 앞에 베풀고, 너희 앞에서 내 이름을 선포하리라. 나는 주다. 은혜를 베풀고 싶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불쌍히 여기고 싶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자비를 베푸시며 보복적 정의의 명령에 구속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다고 말하는 것이 불경스럽습니까? 신이 자비롭지 않다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덜 불경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비가 필연적으로 정의를 무효화하는 것이라면, 그분이 때때로 (어떤 의미에서) “불의”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키르케고르 철학의 특징, 즉 종교적 실존 영역과 윤리적 실존 영역의 구분을 받아들이는 한 이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윤리적인 것 vs 종교적인 것으로서의 정의 대 자비

19세기 덴마크 사상가인 키르케고르의 극도로 복잡한 철학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는 않고 설명하자면, 그가 가명으로 쓴 『두려움과 떨림』에서 그는 윤리적 딜레마라고 할 수 있는 순간, 즉 가능한 모든 행동 방식이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귀결되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야기입니다. 키르케고르는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행동할 때 고려할 수 있는 모든 윤리적 고려 사항을 상상해 보고, 아브라함이 윤리적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행동에서 윤리적 범주들이 “정지”되었다고 가정하지 않는 한 어떤 방법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이러한 범주들이 정지될까요? 그는 아브라함이 신앙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을 취하고 있었다면 이러한 범주들이 유예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는 많은 미묘한 부분들이 있지만, 대략적인 요점은 이렇습니다. 에르케고르는 “종교적 삶” 또는 “신앙의 삶”을 윤리적으로 불가능한 행동, 즉 윤리적 범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서기 때문에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선한 그런 행동을 요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자비” 또는 “용서”는 이 범주에 속합니다. 우리의 윤리적 범주로는 그것이 왜 선한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히 선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도덕적 직관이 좋은 증거의 원천이라는 앞서의 주장과는 정반대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제 말이 모순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비가 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고 대답했다면(물론 그랬겠죠), 저도 동의합니다. 윤리적 범주를 초월하는 신의 자비가 선하다고 말하는 것은 윤리적 범주를 초월하는 신의 고문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 다른가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고문은 윤리적 범주를 초월하지 않고 윤리적 범주에 의해 정죄됩니다. 2) 우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더라도 자비가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또한 우리는 고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를 쉽게 설명 할 수 있습니다). 키르케고르에게 종교는 윤리를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섬으로써 윤리를 초월합니다.

지옥의 교리는 적어도 지옥의 성격과 목적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대해서는 윤리적 범주 안에서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지옥은 정의의 도구로서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곳이며, 이 땅에서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피난처를 얻지 못한 모든 인간이 가게 되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의 죄가 어떻게 영원한 형벌을 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을 가질 수 있지만, [지옥에 대한 전통적 이해에 따르면]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도덕적 자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지옥에서 영원히 지내는 모든 사람은 그곳에 있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에 지옥은 정의를 구현한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원한 지옥에 대한 생각을 받아들여야 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결과를 생각하며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의 비인간성은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로마서 9장)에서 분명히 드러나는데, 바울은 자신의 동족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그 대신 하나님과의 가까운 관계가 끊어지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버림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바란다는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원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자격 없는 자들을 위한 자비입니다. 자비, 특히 보편적 회복은 윤리적 범주에서 쉽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자비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종종 “의무를 넘어선” 것으로 분류되는데, 이는 도덕적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선한 것입니다. 자비는 사랑을 위해 윤리를 초월합니다.

그리스도 vs. 철학자들의 신

이 글의 서두에서 “차라리 철학자들의 신이 낫겠어”라는 말이 가슴에 꽂힌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스도가 다른 신들보다 더 매력적이지 않다면, 우리는 기독교인이 되어야 할 모든 이유를 잃은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큰 이유를 잃은 것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이반 카라마조프의 말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비록 내가 틀렸더라도 차라리 해결되지 않은 고통과 채워지지 않은 분노를 안고 살겠어. 게다가 화합을 위해 너무 높은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 대가를 치르기에는 우리 형편이 너무 벅차. 그래서 나는 서둘러 입장권을 반납하는 거야. 내가 정직한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반납할 의무가 있어.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야.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신이 아니야, 알료샤. 나는 단지 가장 정중하게 그분께 입장권을 돌려드리는 것뿐이야.”

여기서 이반은 악의 문제, 즉 보상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지옥이 상황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생각을 즉시 거부합니다. 지옥은 피해자를 전혀 나아지게 하지 않고 (이반이 원하지 않는) 더 많은 고통만 야기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지옥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도 같은 방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모든 비기독교인이 가는 영원한 지옥에 대한 생각은 나에게 도덕적으로 끔찍해 보이므로, 비록 내가 궁극적으로 틀렸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나의 진실성을 위해서는 입장권을 반납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철학자들의 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철학자들의 신은 인격적인 신이 아니며, 우리는 마치 빅뱅이나 깨달음으로 가는 비밀의 길과 관계를 맺듯이 이 신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 신은 관계도, 위로도 가져다주지 않지만, 실제 고통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우리가 고통을 받는다면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초래한 것입니다. 인격적 신은 이와는 다른 경향이 있습니다. 인격적 신은 확실히 관계적이며, 확실히 윤리적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즉, 신자들은 그 신의 ‘선함’을 윤리적 또는 도덕적 선함으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윤리적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신이 경배받을 가치가 있는지는 부분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최고로 완벽한 존재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이반의 비판이 명백히 적절해지는 지점입니다. 온 인류가 신과 함께 천국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 지옥에서 고통받는 한 사람이라도 필요하다면, 도덕적으로 완벽한 신은 이 세상을 창조했을까요? 이반은 사제인 동생 알료샤에게 이 질문을 던지며 개인적인 의견을 묻습니다. “알료샤, 단 한 사람의 영원한 고통을 대가로 수십억 명의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너라면 창조하겠어?”라고요. 알료샤는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합니다. “아니.”

물론 이것이 지옥의 선함을 반대하는 완전한 증거는 아니지만, 아마도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증거일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한 영원한 지옥은 윤리적으로 가장 완벽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더 나은 세상은 인간이 창조되지 않았거나 인간이 내세를 경험하지 않는 세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지옥 역시 윤리적인 것을 넘어서는 방식으로 윤리를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설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안에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단지 그것이 윤리적으로 나쁜 것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인격적이지만 윤리적으로 나쁜 신과 인격적이지 않지만 윤리적으로 무해한 신 사이의 선택에서 승자는 분명합니다. 이 중 한 신만이 우리에게 “입장권을 반환하라”는 도덕적 의무를 부과합니다.

저는 이것이 비극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성품에 대해 저에게 명백해 보이는 것은 그가 그의 사랑으로 윤리적인 것을 뛰어넘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신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우리는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도록 규정된 간음죄를 저지른 여인의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 사건에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얻는 교훈은 우리가 똑같이 죄가 있을 때 다른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쳐라.” 그러나 놀라운 것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윤리적 권고를 뛰어넘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분명 죄가 없는 유일한 분이시지만, 돌을 던지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여인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말하지 않고, 그녀가 자신을 따를 것이라는 어떤 신호도 보지 않고 그 자체로서 이렇게 하십니다.

율법의 성취자라고 주장하는 이 사람이 율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윤리적 관점에서 볼 때 종교적 지도자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신명기 17장 7절에 나오는 법은 범죄의 목격자에게 가장 먼저 돌을 던지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리스도를 구별되는 분으로 만드는,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이 가지고 있는 특징, 즉 정죄의 특징을 조명합니다. 요한계시록 12장 10절은 모든 경건한 것을 대적하며 인간들을 헐뜯는 “참소하는 자”의 “쫓겨남”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그림은 이러한 이야기와 때로는 거친 이미지를 통해 윤리적인 것을 초월하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이러한 초월은 윤리적인 정의의 덫을 거부하고, 그 대신 지속적이고 영원히 주어지는 용서가 가져다주는 새롭게 함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희생적인 자비를 끊임없이 확장함으로써 인간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철학자들의 신보다 명백히 그리고 가슴이 미어질 정도로 우월한 분의 이미지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원한 지옥에 대한 비전통적 개념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이러한 견해들을 모두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무언가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이 글 전체에 대해 반대하며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옳지만, 하나님께서는 누군가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결코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지옥에 갈 것입니다.” 이 지옥이 실제 불에 의한 고문을 포함하든, 아니면 단지 참소하는 자 옆에서 영원히 사는 고통을 포함하든, 분명히 이 생각은 다른 어떤 것과 마찬가지로 비참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제시한 논증을 피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다른 글에서 다룰 주제이긴 하지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천 년 동안 자비를 베풀어도 마음이 완전히 깨지지 않을 정도로 강퍅한 영혼이 세상에 존재할지 의심스럽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생각해 볼 때, 그분이 그분에게서 떠나 있는 사람들을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을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 대하실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겠으니 이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 Megan Fritts

Megan은 위스콘신-매디슨 대학교(the 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주로 행동이론과 윤리학을 연구하지만, 종교철학(특히 키르케고르)에도 관심이 있습니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달리기를 하거나, 남편과 함께 로마 역사에 대한 팟케스트를 듣거나, 고양이에게 밥을 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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