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S. 루이스와 그가 스승으로 여겼던 조지 맥도널드의 견해를 비교하는 글입니다. MercyOnAll에 올라온 글을 허락을 받고 번역해서 올립니다.
맥도널드와 루이스: 보편적 구원에 대한 스승과 제자의 견해
(MacDonald And Lewis: The Master And The Student On Universal Salvation)
Allyson Flake Matsoso
2022년 1월 25일
(번역: christianuniversalism.kr)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작가인 C.S. 루이스는 작가이자 보편구원론적1 신학자인 조지 맥도널드에 대해 “나는 그를 나의 스승으로 여긴다는 사실을 숨긴 적이 없다.”고 말하고 또한 “나는 그리스도 그분의 영에 그보다 더 가까이에 있거나 더 지속적으로 그 곁에 머무는 것 같은 다른 작가를 거의 알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루이스는 그의 거의 모든 저작에서 맥도널드를 인용했으며, 맥도널드 저작 선집2을 엮기도 했습니다.
분명히 맥도널드는 루이스가 종교적인 믿음을 발전시키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루이스는 맥도널드를 존경하고 그를 본받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스승”의 믿음의 핵심적인 부분인 보편적 구원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조지 맥도널드는 모든 인류가 결국에는 구원을 받아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 글은 두 사람이 이 가장 중요한 신학적인 문제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달랐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주요 차이점은 다섯 가지 영역에 있습니다:
1) 고통
2) 자유 의지
3) 선과 악
4) 하나님의 역할
5) 죽음, 최후의 심판, 지옥
저는 각 저자의 글을 인용하고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전문가들로부터 얻은 통찰을 통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것입니다. 저의 목적은 누가 “옳은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성경 구절을 그들의 사상을 증명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인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연구를 통해 전부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믿음 대부분에,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믿음들에도 그것들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고통
“만일 고난이 구속에 필수적인 요소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세상을 구속하셨거나 더 이상 구속할 수 없는 것으로 보실 때까지 고난이 결코 멈추지 않을 것임을 예상해야 합니다.” (『고통의 문제』(The Problem of Pain), C.S. 루이스)
맥도널드와 루이스는 고난을 이 땅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필수적인 부분이자 축복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고난에 대한 믿음, 즉 우리를 천국의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돕는 고난의 궁극적인 효력에 대한 믿음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맥도널드는 고통이 궁극적으로 의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라 봅니다. 루이스는 고통은 우리가 겸손하게 그것을 직면해야만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봅니다.
맥도널드: “지옥의 불”에 관한 성경 구절을 읽을 때, 우리는 복수심에 불타는 듯한 이미지에 혼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 받을 것이라고 믿는 조지 맥도널드는 이러한 고통의 이미지가 보복적인 형벌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자녀들에게 복수심을 품지 않으십니다. 모든 불에는 목적이 있으며 죄는 반드시 태워버려야 합니다.
“죄에 대해 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복수는 죄인 자신을 그 죄의 사형 집행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정의」(Justic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맥도널드의 『공주와 커디』(The Princess and Curdie)에는 커디가 현명한 할머니의 요청에 따라 장미 불에 손을 넣는 장면이 나옵니다. 불이 정화 작업을 마치자 커디는 누구와 악수하든 그들의 의로움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악한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손이 커디에게 짐승의 발이나 발굽처럼 느껴집니다. 의로운 사람이라면 사람의 손처럼 느껴집니다. 불은 커디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그가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맥도널드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소멸하는 불”을 자주 언급합니다. 불은 태울 것이며, 우리를 태워서 순결하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은 우리의 마음을 겸손하게 만들어 우리의 진정한 본성을 향하도록 하는 데 필요합니다.
“사랑은 순결에 이르기까지 사랑합니다. 사랑은 자신이 바라보는 것의 절대적인 사랑스러움을 항상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 안에서 아름답지 않은 모든 것, 사랑의 종류가 아닌 모든 것은 파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십니다.” (「소멸하는 불」(Consuming Fir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루이스 역시 “지옥의 불”을 고통의 비유로 보고 있습니다. 그는 고통의 유용성에 대해 그의 “스승”과 동의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즐거움 속에서 속삭이시고, 양심 속에서 말씀하시지만, 고통 속에서 소리치신다. 고통은 귀머거리 세상을 깨우는 그분의 확성기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님의 확성기인 고통은 끔찍한 도구이다: 그것은 최종적이고 회개 없는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쁜 사람이 돌이킬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제공한다.” (『고통의 문제』, The Problem of Pain)
그러나 그는 고통의 효과를 확신하게 하는 데 있어 맥도널드에 미치지 못합니다. 교만은 이 겸손케 하는 불이 우리 영혼을 흔들지 못하도록 방해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통은 우리를 “최종적이고 회개 없는 반역”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소멸하는 불”로서의 고통의 유용성은 겸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교만한 자에게 고통은 정화하는 경험이 아니라 타락시키는 경험이 될 것입니다.
“저주받은 자에게 선은 귀머거리의 귀를 때리는 음파처럼 끊임없이 두드리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습니다. 결국 그들은 선물을 받으려는 손도, 음식을 먹으려는 입도, 보려는 눈도 열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The Great Divorce)
자유의지
가장 큰 죄인 교만은 하나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앞세우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의 의지가 천국이나 지옥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자유 의지”에 대한 서로 다른 이해는 맥도널드를 보편적 구원으로, 루이스를 그에 대한 거부로 이끌었습니다. 맥도널드는 자유 의지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봅니다. 루이스에게 우리의 의지는 저주의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맥도널드는 칼빈주의의 예정 교리에서 “탈출”했지만, 의지가 “완전히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선을 위한 것이라는 믿음(주지주의적 자유, Intellectualist Freedom)을 유지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정”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의지는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려보냅니다. 루이스는 도덕법이 우리를 인도하지만, 우리의 의지는 잘못하거나 옳을 자유가 있다는 견해를 취합니다(주의주의적 자유, Voluntarist Freedom). 맥도널드는 자유 의지를 “궁극적으로 선을 선택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루이스는 자유 의지를 “선과 악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자유의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라, 압도적인 충동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힘입니다. 거기에 참으로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부인」(Self-Denial),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는 반드시 궁극적으로 선을 선택할 것입니다. 반항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기본은 선함입니다.
그의 책 『릴리스』(Lilith)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불이 가장 반항적인 의지를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묘사를 읽습니다. 그는 아담의 첫 번째 아내이자 가장 사악한 여성인 릴리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릴리스는 고통받는 신하들을 잔인하게 다스리고 자신의 딸을 포함한 많은 아이들을 죽입니다. 릴리스는 회개하지 않고 자신의 타락한 의지를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녀는 정의로운 슬픔의 여인 마라를 마주하는데 그녀는 이렇게 호소합니다,
“오랫동안 해온 사악한 짓에서 돌아서지 않겠습니까… 당신은 이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입니다! 진짜 당신 자신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내 본성을 따를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모릅니다, 당신의 본성은 선하고 당신은 악을 행합니다.”
“나는 내가 되려는 나 자신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이가 나를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이가 당신을 만들었고, 당신이 스스로 만든 것을 보도록 강요할 수 있습니다. 의지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빛, 그 뒤에 있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은 당신의 의지를 바꿀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진정한 당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 그림자의 것이 아닌. 피조물 속에 창조하는 의지를 부어 넣을 수 있고, 그래서 그것을 구속할 수 있습니다!”
반역자의 의지를 변화시키는 빛, 우리 아버지의 인내하고 실패하지 않는 빛은 맥도널드가 하나님의 사랑이 지옥보다 더 깊다고 선포할 때 붙잡고 있는 희망입니다!
반면에 루이스는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께 결속시켜야 하지만 우리가 그러지 않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악에서 결코 찾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영원한 지옥을 가능하게 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하나님께서 ‘좋아, 그럼 네 뜻대로 해라’라고 말씀하시는 사람들.” (『천국과 지옥의 이혼』, The Great Divorce)
루이스는 “어떤 것이 선할 자유가 있다면 악할 자유도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진정한’ 선의 문을 열어줍니다. 의로운 선택은 우리가 그 선택을 하도록 정해져 있다면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자유의지는 악을 가능하게 하지만, 사랑이나 선함 나아가 기쁨과 같은 가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스크류테이프의 편지』(Screwtape Letters)」에서 루이스는 적의 전술, 즉 의지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제공합니다. 악마 스크류테이프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지’에 대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혐오스러워하며 묘사합니다.
“우리에게 인간은 일차적으로 음식이다. 우리의 목표는 그 의지를 우리의 의지로 흡수하는 것이며, 그것을 희생하여 우리 자신의 자아의 영역을 늘리는 것이다. 그러나 적(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순종은 전혀 다르다. 그는 정말로 우주를 자신의 혐오스러운 작은 복제품, 즉 자신이 그들을 흡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의지가 자유롭게 그를 따르기 때문에 질적으로 자신과 닮은 피조물로 가득 채우기를 원한다.” (『스크류테이프의 편지』, Screwtape Letters)
두 가지 반대되는 것 사이에서의 순수하고 독립적인 선택의 자유가 루이스의 교리의 핵심입니다. 스크류테이프가 우리를 집어삼킬 기회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환영하실 기회도 없습니다.
선과 악
이 세상의 삶은 선과 악의 싸움이며, 인생의 목적은 선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 악에서 벗어나 순종을 통해 참된 본향을 향해 나아가라고 촉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맥도널드의 신뢰가 어떻게 그가 죄를 다르게 바라보도록 이끌었는지, 즉 죄의 결과를 덜 두려워하고 언젠가는 우리가 깨닫고 겸손해질 것이라는 더 큰 희망을 갖게 했는지 봅니다. 루이스에게 죄 많은 삶은 우리 자신을 저주하는 데 성공할 수 있기 때문에 끔찍하고 영원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하나님 외에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 한 길고 끔찍한 이야기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합니다. 그분 밖에서는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기에 우리는 그분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분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들은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 그분께 순종하십시오! 순종은 죄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죄는 죄인이든 무고한 사람이든 대부분의 인간 고통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은 죄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한 사람은 죄를 일시적인 것으로 보고, 다른 한 사람은 잠재적으로 영원히 타락할 수 있는 것으로 봅니다.
맥도널드:
“악이 있던 그곳에 선이 있어야만 악이 죽습니다. 악한 것은 선이 되기로 선택할 때까지 악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것[선을 선택하는 것]만이 악을 죽이는 것입니다.” (『릴리스』, Lilith)
맥도널드는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자녀로 보기 때문에 죄는 근본적으로 이해의 부족이라고 믿습니다(플라톤과 공유하는 견해). 죄는 우리의 의지가 아직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충분히 배우지 못했지만 배우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당시 그 사람과 그의 조건에서는 최선의 선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최선의 모습입니다.” (『판타스테스』, Phantastes)
맥도널드에게 죄는 방해물이고 악은 선의 뒤틀림입니다. 그러나 이 삶은 발견을 위한 것이며, 덕을 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때(플라톤적 관점) 우리는 하나님을 갈망하게 될 것입니다. 악의 고통스러운 결과와 함께 사는 것은 우리가 이러한 이해를 얻고 선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보편적 구원에 대한 믿음은 더 긴 타임라인을 가져옵니다. 맥도널드는 항상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 죄는 결국 정복될 것이므로 죄는 그 찌르는 독침을 잃게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의 고통은 이 땅에서 견디기 힘들지만, 궁극적으로는 정의와 자비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와 함께 노력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것입니다.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간에 쫓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은 빨리 시작할수록 좋습니다!” (『릴리스』의 베인 씨와 레이븐(The Raven), Mr. Vane and The Raven in Lilith)
루이스에게 이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원하는지, 기쁨을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통해 선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순종과 속죄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모든 죄는 아무리 작더라도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죄의 누적된 결과가 사람을 빛에서 멀어지게 하고 무(無)에 이르게 만들기에 죄가 얼마나 작은지는 중요하지 않다. 카드놀이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점에서 살인은 카드놀이보다 나을 것이 없다.” (『스크류테이프의 편지』, Screwtape Letters)
루이스는 죄의 궁극적인 원인이 교만이라고 믿습니다. 교만, 그 “영적인 암”은 우리의 바람을 하나님의 바람에 맞서게 합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드러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교만은 우리의 방식,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방식과 뜻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것입니다.
“순결하지 않음, 분노, 탐욕, 술 취함, 그 모든 것은 비교하자면 벼룩에 불과합니다. 악마가 악마가 된 것은 교만을 통해서였습니다. 교만은 다른 모든 악을 초래합니다. 그것은 완전한 하나님에 반대하는(anti-God) 마음 상태입니다.”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우리는 루이스의 죄에 대한 견해에서 긴박함을 볼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의 의지를 영원히 뒤틀어 놓을 수 있으며,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을 멈추고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나 딸이 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C.S. 루이스는 많은 글에서 악의 점진적인 본성을 강조합니다. 하나의 작은 죄가 더 큰 죄로 이어지고, 회색이 검은색으로 변하며, 판단이 증오로 변합니다.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어야 하며, 그는 바로 그 제목의 책(『고통의 문제』)에서 그렇게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잘 해결”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죄로 인한 고통이 항상 변혁적인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사악함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그 고통이 우리 자신의 마음을 굳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우리 삶의 고통은 미래 행복의 보장에 의해 무뎌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속죄의 변화시키는 능력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역할
두 사람의 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하게 느껴집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가 그분께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죄로 인해 타락했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회복하실까요? 저 먼 은하계에서 우리를 다시 데려오실까요? 여기서 [루이스와 맥도널드가] 갈라서는 지점은 중요합니다. 맥도널드에게 하나님은 그분의 소중한 자녀 한 명 한 명이 그분과 함께 안전하게 본향에 돌아올 때까지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루이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자신의 선택에 맡기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맥도널드: 맥도널드는 모든 사람의 궁극적인 기도는 동일할 것이며, 응답을 받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응답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며 그분께로 우리는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모두 안에 있습니다.(We are All in All.) 그분은 우리 안에 거하시기 위해 사소한 죄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보편구원론이 하나님이 죄를 용인하신다고 주장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교리적 분파는 그렇지만 맥도널드의 보편구원론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그분의 자녀에게서 죄에 대한 욕망이 “불타버릴” 때까지 그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무한히 행하실 것입니다.
반면에 루이스는 독립적 선택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독립성, 우리가 자유라고 부르는 것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이 독립성을 기꺼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참된 자유와 교환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거래를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순종은 천국으로 가는 길입니다.” (『영광의 무게』, The Weight of Glory)
『순전한 기독교』에서 설명한 대로 하나님의 도덕법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그분의 사랑, 아름다움, 결과, 경험은 우리를 돕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적인 선택은 중요하며, 심오한 차원에서 우리를 하나의 길이나 다른 길로 인도하고 우리의 본성의 방향을 돌려 놓습니다.
“우리는 매일 찬란한 영광의 피조물이 되어가거나, 상상할 수 없이 끔찍한 존재가 되어갑니다.”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그러나 우리의 사랑의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노력하시며, 우리가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우리를 다시 끌어당기기를 원하십니다. C.S. 루이스는 『예기치 못한 기쁨』(Surprised by Joy)에서 방황하는 자신의 영혼을 회심시키는 데 하나님이 어떤 역할을 하셨는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의 순간은 그의 삶에서 하나님의 흔적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기쁨은 상기시켜 줍니다. 그것은 결코 소유물이 아니며, 항상 더 오래 전 또는 더 멀리 있거나 여전히 ‘곧’ 있을 무언가에 대한 소망입니다.” (『예기치 못한 기쁨』, Surprised by Joy)
맥도널드는 죄의 타락시키는 본성에 대한 루이스의 생각에 제한을 둡니다. 그에게 있어 “끔찍한 것의 창조자가 되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끔찍한 죄악의 비참한 부산물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사용하실 것이고, 고통을 사용하실 것이고, 심지어 반항을 사용하여 행복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실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스와 맥도널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데 동의하지만, 맥도널드는 –모두가 그분을 사랑할 것이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맥도널드는 죄를 악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모든 죄는 하나님에 의해 멸망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일차적으로 하나님은 죄를 벌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 아니라 죄를 멸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십니다.” (「정의」(Justic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맥도널드의 글에는 진리나 선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그에 수반되는 고통/교훈 때문에 그것을 기회로 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속 손을 내미십니다. 맥도널드가 사용한 한 가지 극단적인 예는 유다입니다. 맥도널는 유다의 배신조차도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만약 배신자이자 돈을 사랑하는 절도범 유다를 깨닫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끝까지 일을 진행시켜 그의 키스로 주님을 배신하도록 내버려두는 것뿐이라면 어떨까요?” (「마지막 가면 벗기기」(The Final Unmasking),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맥도널드는 우리의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다음 우리를 저주 속에 남겨 두실 것이라는 생각으로부터 “혐오감을 가지고 돌아섭니다”.
“하나님 자신은 그의 가족 하나하나가 그분의 마음으로 돌아와서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고 심오하며 광범위하고 섬세하고 강렬한 연합으로 그분과 하나가 될 때까지 신성한 불안에 사로잡혀 있을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진리」(The Truth in Jesus),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하나님은 그분께로 “모든 사람을 이끌기” 위해 그분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의 본을 따르는 순종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회개는 우리가 같은 실수를 할 수 없게 될 때 성취됩니다.
“그분에게는 모든 목적과 의미와 노력과 끝이 단순합니다, 즉 우리가 그분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나 명백해서 누구나 볼 수 있고, 누구나 보아야 하고, 모두가 볼 것입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전적으로 진실하시고 선하시며, 그분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가운데 선 아이」(The Child in the Midst),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루이스는 기적에 관한 책을 썼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와 함께 노력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인다면 그분은 우리를 “오두막집에서 궁전으로” 재건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자유주의적 입장(libertarian stance)을 가지고 계십니다. 즉,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고 그 결과에 직면하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분을 사랑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원한다면 그분은 우리가 계속 방황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유한한 자유 의지가 전능하심과 공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의 문제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매순간 일종의 신적인 양보를 수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기도의 효능」, The Efficacy of Prayer)
맥도널드의 하나님은 결코 양보하지 않으시고 바로 그 지옥의 불 속으로 들어가십니다. “하나님의 강렬한 사랑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피난처는 없습니다.”(로버트 팔코너, Robert Falconer)
죽음, 최후의 심판, 지옥
루이스와 맥도널드는 용감하게 죽음과 지옥을 다룹니다. 그들은 이 어려운 주제를 회피하지 않습니다. 맥도널드는 우리 모두가 구원 받을 것이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음과 지옥을 궁극적인 선을 향한 통로로 봅니다. 루이스는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능력을 강조하지만, 이생의 삶은 시험이며 여기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에 따라 스크류테이프의 아버지인 사탄에게로 또는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인도됩니다.
맥도널드: 맥도널드에게 죽음은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으며, 그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가는 통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회개를 통해 우리의 반항적 의지를 죽여야 하는 영적 죽음에 비하면 미미한 것입니다. 『릴리스』(Lilith)에서 베인 씨는 다양한 죽음의 단계에 있는 남성들과 여성들의 침대로 가득 찬 방을 발견합니다. 처음에는 누워서 자발적으로 “죽어야” 한다는 제안에 겁에 질렸지만, 많은 고통과 깨달음 끝에 베인 씨는 이 죽음을 갈망하며 하나님을 향해 깨어나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제 막 살아나 죽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오기 훨씬 전부터 죽기 시작했는데, 즉 살아나기 시작했는데, 그런 사람들이 실제로 죽으면 그 순간 그들은 깨어나 우리를 떠날 것입니다……. 겁쟁이가 되지 마세요, 베인 씨. 두려움에 등을 돌리고 다가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향해 얼굴을 돌리세요. 밤에 몸을 맡기면 진정으로 쉬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해악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예측할 수 없었던 선이 올 것입니다.” (『릴리스』, Lilith)
루이스: 우리는 루이스에게서 “죽음의 유용성”에 대한 메아리를 봅니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루이스가 모든 사람이 회개를 위해 이 영적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는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것도, 심지어 가장 훌륭하고 고귀한 것조차도 지금처럼 계속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도, 심지어 가장 낮고 가장 천한 것조차도 죽음에 복종하면 다시 살아날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몸을 심고 영적인 몸을 일으킵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Great Divorce)
그러나 이 생이 끝나고 세상이 끝나면 우리는 어떻게 분류될까요? 심판에 관한 루이스의 글은 맥도널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맥도널드의 칼빈주의자 조상들이 경고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변덕에 따라 분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문”에 들어갈지를 우리가 결정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일치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중 누구를 사랑했는지에 따라, 우리 영혼의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니다.
『나니아 연대기』의 마지막 편인 『최후의 전투』에서 루이스는 “최후의 심판”이라고 할 수 있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그 생명체들은 돌진해 왔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별들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들의 눈은 점점 더 밝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슬란의 바로 앞에 왔을 때 그들 각자에게 두 가지 중 한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아슬란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고,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두려움과 증오로 가득 찬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아슬란을 쳐다본 모든 생명체들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거대한 검은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아이들은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생명체들은 아슬란의 얼굴을 보고 그를 사랑했으며 그들 중 일부는 동시에 매우 무서워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문 안으로 들어와 아슬란의 오른쪽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초의 분류 이후에도 여전히 약간의 변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지상의 삶이 어떤 이들에게는 충분한 “시험”이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는 듯합니다. 중독, 트라우마, 짧은 수명은 사후에 어떤 가르침을 필요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가 완전히 이해하기를 원하십니다.
루이스가 쓴 비유적 이야기인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 이 점이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여행자들은 지옥으로 돌아갈지 결정하기 전에 천국을 방문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가 묘사한 지옥인 “회색 마을”은 집, 상점, 심지어 버스까지 있어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불멸의 삶은 필멸의 삶과 거의 똑같아 보이지만 주민들의 교만과 이기심은 그곳을 지옥으로 만듭니다. 적대감과 이기심은 고립의 지옥을 만듭니다. 그들은 서로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 도착할 때까지 끊임없이 다투며 점점 더 멀리 이동합니다. 아직 우주로 표류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여 천국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천국”으로 향하는 화자 C.S. 루이스와 몇몇 동료 여행자들을 따라갑니다. 이 여행 단계는 루이스가 연옥이라고 부르는 단계입니다. 천국 여행에서 루이스에게는 스코틀랜드의 신학자 조지 맥도널드라는 훌륭한 “가이드”가 제공됩니다.3 그의 동료 여행자들도 죽은 지인 또는 가족의 안내를 받습니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은 가이드가 말하는 진리를 거절합니다. 그들의 교만한 마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옥으로 향하는 버스에 다시 올라탑니다. 그들은 회개할 능력을 상실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의 지옥은 하나님이 “보내신” 곳이 아니라 우리가 기꺼이 선택한 곳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후회보다는 이기심 속에 있습니다.
“나는 저주받은 자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성공한 반역자이며, 지옥의 문은 안쪽에서 잠겨 있다고 기꺼이 믿는다; … 그들은 그들이 요구한 끔찍한 자유를 영원히 누리며, 따라서 스스로 노예가 된다: 복된 자들이 영원히 순종하며 영원토록 점점 더 자유롭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고통의 문제』, Problem of Pain)
맥도널드는 자비로운 소멸의 불에 의해 충분히 밀려나면 우리 모두 하나님을 선택하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루이스는 우리가 지옥에서 우리 자신의 불을 지핀다고 말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문을 강제로 열지 않으실 것입니다. 지옥에서 지배적인 감정은 후회가 아니라 이기심입니다.
“나는 만일 백만 번의 기회가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 기회는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소년이나 부모가 알지 못할 때 스승은 종종 소년을 어떤 시험을 위해 다시 보내는 것이 정말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안다. [기회의] 끝은 언젠가는 반드시 오며, 전지(全知)자가 그 시기를 안다고 믿기 위해 아주 강한 믿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고통의 문제』, Problem of Pain)
지옥에 오래 있을수록 지옥을 떠날 가능성은 줄어듭니다. 우리의 이기심이 우리의 영혼을 시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저주받은 자의 영혼은 거의 아무것도 아니며, 그 자체로 희미해졌고 닫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 Great Divorce)
맥도널드: 맥도널드에게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에는 “최종적”인 것이 없습니다. 지옥은 불타오르지만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지옥에 오래 머물수록 빠져나올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는 영원까지 확장됩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 지옥에서 영원을 선고하는 공의는 없지만, 단 한 번의 죄의 충동이라도 허용하는 자비는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자비가 그분의 자녀를 구속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지옥은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의」(Justic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따라서 맥도널드의 교리가 더 궁극적으로 희망적이지만, 우리는 루이스의 『천국과 지옥의 이혼』보다 맥도널드의 『릴리스』에서 “연옥”이 더 어둡게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고통은 변화의 주된 동기입니다. 그림자가 숨어 있습니다 – 끔찍한 릴리스 공주가 공포로 통치합니다. 지상에서 폭압적이거나 오만했던 자들과 “잠들지 않는”(회개하지 않는) 자들은 매일 밤 다른 죽은 자들과 전투를 벌여야 합니다. 헛되고 진실되지 못한 자들은 얼굴 없이 살아야 하는데, “얼굴 가면을 만들었던 그들은 그 가면을 빼앗기고 회개할 때까지 얼굴 없이 살도록 정죄를 받았다”고 합니다.
지옥은 거칠기 때문에 천국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자기 부정이 아닌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모든 상급은 순수한 것입니다. 이기심에 대한 죽음이 없이는 [이 상급은] 영혼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천국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를 잊고, 각자가 모든 사람 안에 거하고, 모든 사람이 각자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Self-Denial),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제스 레더만은 『소멸하는 불』의 서문에서 루이스와 맥도널드의 지옥관을 대조합니다.
“맥도널드는 지옥이 어떤 곳일지에 대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과거에 삶을 견딜 수 있게 해준 전부였던 하나님의 임재를 완전히 잃어버린 채 자기 자신과 홀로 있는 인간의 기괴할 정도로 암울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맥도널드의 지옥은 C.S. 루이스가 상상하는 지옥과 비슷하게 내부에서 문이 잠겨 있지만, 맥도널드가 다른 점은 그곳에서의 존재는 어떤 인간도 견딜 수 없을 것이라는 믿음에 있습니다. 어느 순간 희미한 회개의 빛이 자아라는 감옥의 완전한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지옥조차도 하나님의 도구이며 사탄은 그분의 사랑의 목적을 위해 사용됩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것이지 마귀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소망』, Hope of the Gospel)
두 사람 모두에게 지옥은 반역적인 의지가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맥도널드에게 지옥은 의지를 단련하는 곳입니다. “지옥의 한 가지 원칙은 “나는 나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만들어낸 “고난의 불”은 참을 수 없는 격렬함으로 인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죽음”을 추구하게 될 때까지 격렬하게 타오를 것입니다. 루이스에게 지옥은 의지를 굳히는 곳이며 우리의 영혼을 희미하게 하는 곳입니다. “지옥에 있는 모든 것들은 지옥을 선택합니다. 그런 자기 선택이 없다면 지옥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변화될 수 있다면 이 땅에서 고통의 불을 사용하여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죽으면 그분은 그 선택이 분명해지도록 하시겠지만, 우리가 살아서 쌓은 교만이 우리를 노예로 만들고 더 이상의 “불”이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는 교훈에 반대하도록 만들 수도 있습니다.
요약 및 일치점
맥도널드와 루이스는 서로 동의하는 것이 동의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 불일치는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루이스가 맥도널드의 보편구원론에서 벗어나게 된 차이의 핵심은 바로 우리의 의지를 바라보는 시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맥도널드: MercyOnAll.org의 공동 설립자인 매튜 로어크(Matthew Roark)는 이렇게 말합니다.
“맥도널드에게서 모든 죄는 실수입니다. 죄는 무지와 오해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실수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가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 상태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맥도널드는 우리의 실수조차도 우리를 자유로 인도할 것이라 봅니다. 왜냐하면 죄가 초래하는 고통은 그것을 피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본질적으로 보편구원론적인데, 왜냐하면 결국에는 어쩌면 수많은 세월이 지나고 나면 모든 사람이 죄의 해악을 깨닫고 죄를 피하여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루이스는 자유의지에 대한 주의주의적 관점을 취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우리에게 유일한 선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양자택일의 선택이 존재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않으며 선은 진정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으며 우리는 영원히 반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만과 이기심은 강력한 것이며, 죄로 뒤틀린 영혼은 하나님의 “소멸하는 불”에도 저항합니다. 그래서 화상을 통해 배우는 아이와 달리 우리는 촉각을 잃고 이해력이 무감각해집니다.
단기적으로 맥도널드의 “방법”은 현대인의 감수성에는 가혹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하다면 우리가 “지옥에서 불타고” 고통과 죽음을 겪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영원히 자비로우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를 떠나지 않으실 것입니다. 본성(Nature)이 지배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분께로 돌아갈 것입니다. “어떤 피조물이라도 그분을 있는 그대로 알면서도 그분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의로움」(Righteousness),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루이스의 견해는 여러 면에서 덜 심각합니다. 죄인을 위한 구덩이는 없으며,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영원히 그분에게서, 사랑과 기쁨에서 더 멀리 떨어져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양육(Nurture)이 지배합니다 – 우리가 악을 키우면(nurture) 우리의 본성이 변하여 악해집니다. 선함을 키우면(nurture)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지금이 올바른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기회를 주시기 위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기회를 잡거나 버려야 합니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일치점: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을 보복적이거나 징벌적인 분이 아닌 사랑하는 성품을 가진 분으로 봅니다. 죄는 형벌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참된 회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모든 자녀는 집에서 환영받을 것입니다. 루이스는 보편적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죄인을 외면하실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우리가 지옥에 있다면 결코 회개하는 죄인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루이스와 맥도널드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대해 생생하게 서술합니다. 차이점은 이 사랑이 궁극적으로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돌아오든 그렇지 않든,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이 우리의 본향이라고 믿습니다.
“드디어 고향에 돌아왔어! 여기가 진짜 나의 나라다! 나는 이곳에 속해 있어.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땅이 여긴데 지금까지도 전혀 몰랐어!” (『마지막 전투』, C.S. 루이스)
“하나님 자신 – 그분의 생각, 그분의 뜻, 그분의 사랑, 그분의 판단은 인간의 고향입니다. 그분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그분의 뜻대로 선택하고, 그분의 판단대로 판단하고, 따라서 그분이 우리 안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바로 고향에 있는 것입니다.” (조지 맥도널드)
루이스와 맥도널드 모두 진리를 강조합니다. 루이스의 『인간 폐지』(Abolition of Man)는 객관적 진리를 두고 벌어지는 주관적 전쟁을 고찰합니다. 맥도널드는 순종이 우리에게 진리를 열어준다는 생각을 강조합니다. 현대의 많은 보편구원론자들은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기울어질 수 있지만, 맥도널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를 따르기만 하면 기쁨과 지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지 맥도널드와 C.S. 루이스의 글을 읽고 묵상할 때면 하나님의 사랑이 제 삶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낍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드물게 두 사람이 갈라선 지점에서 저는 두 관점 모두에서 진리를 느낍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견해가 갈라서는 주요 지점인 보편적 구원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요? 저는 두 사람의 대조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과 제 자신을 바라보는 중요한 관점에 도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맥도널드가 상상하는 대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비록 잘못할 수는 있지만, 이 생에서가 아니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발견의 길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 말입니다. 이런 관점은 제가 판단을 자제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해줍니다. 하지만 제 자신의 삶을 성찰할 때 저는 루이스가 상상하는 것처럼 저 자신을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의 행동을 통해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거나 끔찍한 존재가 되기를 결정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저는 매일의 발전과 겸손에 계속 집중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와 맥도널드의 차이점과 일치점을 발견하려는 이 시도가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이 두 사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앨리슨 플레이크 맛소소(Allyson Flake Matsoso)
도움을 주신 매튜 로어크(MercyOnAll.org), 데이비드 베이츠(Pints with Jack), 케빈 마틴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맥도널드와 루이스에 대한 그들의 전문 지식은 이 글을 발전시키는 데 매우 귀중한 도움이 되었습니다.
속죄에 관한 노트
“잘못을 저지른 자에 대한 처벌은 저질러진 잘못을 속죄하지 못한다.” (「정의」(Justic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우리는 여기서 전통적인 정의와 자비 개념에 대한 맥도널드의 관심의 시작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러한 덕목에 대해 몇 가지 흥미로운 진술을 합니다. 그의 사상은 심판과 진정으로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영원한 지옥은 정죄받은 사람이나 그의 피해자들, 또는 하나님을 위한 “정의”가 아닙니다. 죄인의 변화 없이는 죄의 용서도 역시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시다면, 그분과 우리 각자는 “신앙의 완성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죄에 머물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정의”가 아닙니다. 어떤 “선한” 재판관도 죄가 해결되지 않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맥도널드가 속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그분께는 인간은 죄를 버리고 그분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외에 어떤 속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용서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중보자가 필요하고, 그러므로 그분은 그들에게 중보자를 주셨습니다.” (「정의」(Justice), 『전하지 않은 설교』(Unspoken Sermons))
속죄에 대한 맥도널드의 견해는 위의 의지, 고통, 보편적 구원에 대한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에 다른 에세이에서 다룰 주제입니다. 그러나 고통이 우리의 의지를 개혁하는 것으로 보는 맥도널드의 견해를 이해하고 정의에 대한 맥도널드의 논의에서 통찰력을 얻으면 그가 왜 무고한 이가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는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루이스는 속죄에 대한 특정 “이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속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론이 있지만, 모든 기독교인이 동의하는 것은 속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음식이 어떻게 영양을 공급하는지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도 저녁을 먹을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것을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것입니다.“
루이스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 정의와 자비를 만족시키며, 우리의 회개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도움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루이스와 자유의지/고통 — http://augustinecollective.org/the-theodicy-of-cs/
맥도널드와 정의
— http://experimentaltheology.blogspot.com/2010/06/george-macdonald-justice-hell-and.html?m=1
플라톤과 루이스
자유 의지의 여러 버전들
지옥의 ‘처벌 모델’ vs ‘선택 모델’에 대한 흥미로운 글
— http://www.saintsandsceptics.org/engaging-tim-keller-cs-lewis-and-explaining-the-fires-of-hell/
자기 부인, 『전하지 않은 설교』
https://www.mercyonall.org/posts/self-denial
속죄에 대한 C.S. 루이스의 견해
— https://billmuehlenberg.com/2016/11/25/c-s-lewis-theories-atonement/
- 여기서는 맥도널드의 믿음에 대해 보편구원론적(Universalist)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의 견해는 교부들의 보편구원론과 일치합니다. 그러나 보편구원론은 열려 있고 다양성을 지닌 용어입니다. 맥도널드의 신학은 여러 면에서 독특하며 수백만 명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맥도널드는 자신을 보편구원론자로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맥도널드의 아들이 쓴 『조지 맥도널드와 그의 아내』(George MacDonald and His Wife)라는 책에서 우리는 맥도널드가 “보편구원론”에 대해 불편해 했고 그 이유는 “이제 영원한 응보를 대중적인 미신으로 여겨 폐기해버리고 나서는 지옥 불과 함께 하나님 나라로 돌아가기 위한 회개의 필요성까지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보편구원론자들의 점점 더 안이해지는 경향”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글을 통해 회개 없는 영원한 구원은 맥도널드의 “보편구원론”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도널드와 보편구원론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웹사이트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https://www.mercyonall.org/universalism-in-scripture
http://www.worksofmacdonald.com/musing-on-macdonald/2021/3/16/the-believing-faculty-george-macdonald-on-universal-salvation ↩︎ - 역주) 번역본: 홍종락 역, 『조지 맥도널드 선집 – C. S. 루이스의 스승』, 홍성사, 2021. ↩︎
- 흥미롭게도 조지 맥도널드는 『천국과 지옥의 이혼』(The Great Divorce)에 묘사된 사후의 조지 맥도널드가 한 일부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루이스는 보편적 구원에 대한 맥도널드의 믿음을 잘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에게 이러한 견해에 대해 묻기도 합니다. 맥도널드는 그에게 시간의 렌즈를 통해 영원한 질문을 던지는 오류를 상기시키며 “모든 것의 끝은 아무것도 알 수 없다. 모든 대답은 속이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13장에 나오는 이 위인들 간의 토론은 유익합니다. 루이스는 자신의 견해와 맥도널드의 견해를 조화시키려고 노력하며, 어쩌면 보편적 구원의 길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까지 제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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