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https://mercyonall.org/posts/how-to-read-the-bible-from-a-universalist-perspective
보편구원론적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법
(How To Read The Bible From A Universalist Perspective)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t)
번역: christianuniversalism.kr
이 글은 2018년 4월 28일 로드아일랜드 프로비던스(Providence, Rhode Island)에서 열린 도어 스탠딩 오픈 컨퍼런스(the Door Standing Open Conference)에서 제가 발표했던 내용입니다. 저는 특히 성경 전체를 보편구원론적으로 읽는 것이 칼빈주의적으로 읽거나 알미니안주의적으로 읽는 것보다 훨씬 더 합리적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는 또한 특정 신학적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도 다룹니다.
서론
저는 고백으로 시작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성경 전체를 보편구원론적으로 읽는 주석적 근거에 대해 전적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그러한 성경 해석에 반대하는 표준적인 논증들이 전적으로 지지받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음을 여기서 먼저 고백합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제가 접한 거의 모든 반대 논증들은 둘 중 한 가지 측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다소 초보적인 논리적 혼동에 근거하고 있거나, 아니면 제가 앞으로 설명할 방식으로 쉽게 뒤집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의 언어에 대한 전문가도 아니고 다양한 문서들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전문가도 아닌데, 우리 기독교 보편구원론자들과 매우 다르게 성경을 해석하는 저명한 학자들의 수많은 주장을 어떻게 그렇게 자신 있게(심지어는 합리적으로) 거부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 뒤에는 성경을 전체로서 해석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더 기본적인 질문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특히 좀 더 진보적인 입장을 가진 학자들)은 충분히 그런 노력에 의구심을 품을 수 있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것[성경을 전체로서 해석하려는 것]을 일관성 없는 프로젝트라고 일축할 것입니다. 종교적으로 보수적인 학자들도 일반적으로 인정하듯이 성경은 한 명의 (인간) 저자가 쓴 단일한 텍스트가 아니며, 신약학자인 도널드 해그너(Donald Hagner)가 말했듯이 하늘에서 풍선을 타고 내려온 조직신학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성경은 다양하고 복잡한 방식으로 종교적 상상력에 호소하는 풍부하고 다채로운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다양한 저자들의 다양한 관심사와 글쓰기 스타일, 일부 문서들의 역사, 여기에 포함된 다양한 관점들을 고려할 때, 상상력이 풍부하다면 거의 항상 여러 요소들을 조합해낼 적절한 방법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전체로서의 성경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역사적, 언어적 연구의 결과일 뿐 아니라 예술이자 상상력의 작품이며 신학적 추론의 산물입니다. 태양계의 천동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행성의 변칙적인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았던 것처럼, 특정 신학 체계의 관점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성경의 변칙적인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찾게 됩니다.
저는 성경을 이해하는 데 있어 성경 학자들의 기여를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저는 항상 전문가가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분야의 어떤 구체적인 논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그렇게 할 필요도 없는데, 왜냐하면 대규모 신학 논쟁, 특히 칼빈주의자, 알미니안주의자, 보편구원론자 사이의 논쟁은 학문적인 세부 사항에 결정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며, 아마도 이것이 각 신학 진영에서 모두 뛰어난 학자들을 찾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어쨌든 이제 저는 왜 성경 전체에 대한 보편구원론적 해석이 다른 어떤 경쟁하는 해석보다 훨씬 더 타당해 보이는지 설명하려고 합니다.
분명해 보이는 성 바울의 보편구원론(Saint Paul’s Apparent Universalism)
바울서신의 많은 본문이 그 자체의 맥락 속에서 볼 때 명시적으로 보편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처럼 [최소한 그렇게] 보인다는 것은 신약성경을 주의 깊게 읽는 독자들에게는 분명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거듭해서 하나님께서 결국 만물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키고(고전 15:20-28),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화해시키며(골 1:20),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주실 것(롬 5:12-21)이라는 취지의 진술을 명시적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진술은 모호하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며, 실제로 일부 사람들이 이를 [다른 뜻이라고] 설명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자체가 이 진술들의 명료성과 힘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한 구절, 즉 로마서 5장 18절1을 자세히 살펴보고 그 병렬 구조(parallel structure)를 먼저 생각해 봅시다.
Therefore just as one man’s trespass led to condemnation for
all [humans],
so one man’s act of righteousness leads to justification and life
for [them] all.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가 모든 [사람]에게 정죄를 가져온 것처럼,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가 [그들] 모두에게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가져다 줍니다.)
바울에게 전형적인 이러한 병렬 구조의 요점은 단 한 그룹의 사람들을 특정하고 그 한 그룹에 대해 두 개의 병렬적인 진술(parallel statements)을 하는 것이며, 따라서 실질적인 효과는 어떤 애매함의 가능성도 제거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의 불순종 행위의 결과로 정죄를 받게 된 바로 그 사람들이 두 번째 아담의 순종 행위의 결과로 결국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는 바울이 19절에서 말한 것처럼, 첫 번째 아담의 불순종 행위의 결과로 죄인으로 규정된 바로 그 사람들이 두 번째 아담의 순종 행위의 결과로 결국 의인으로 규정될 것입니다. 저는 바울이 이 점을 어떻게 하면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로마서 5:18의 직접적인 맥락에서 바울이 그의 말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널리 퍼진 가정을 정당화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논증 중 하나는 바울이 “넘치는 은혜와 의의 값없는 선물을 받는 사람들”에 대해 말한 5:17에 호소합니다. 예를 들어, 더글러스 J. 무(Douglas J. Moo)는 “1:16-4:25에서 의를 얻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에 대해 지속적으로 강조한 것과 더불어, 신중한 언어로 표현된 17절은 특정한 사람들만이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로부터 혜택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2라고 말합니다. 신약학자 랄프 P. 마틴(Ralph P. Martin)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바울이 19절에서 “많은 사람”(the many)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지적하는데, 마틴은 이 표현을 “‘모두'(all)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할 때 그 [포함된] ‘모두'(the all)가 적은 수가 아니라는 확신을 나타내는 셈어의 표현 방식”3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 두 가지 논증 모두 조금도 그럴듯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칭의와 생명을 결국 얻는 사람의 수를 제한하려고 노력하며 5:17에 호소하는 무의 주장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결정적인 반론이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 무는 바울이 “받다”(to receive, lambanō)라는 동사를 수동적인 의미로 분명히 사용한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수동태라는 문법적 개념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바울이 “채찍 마흔 대에서 하나를 뺀 것을 맞은(received, lambanō의 변형)[능동태] 것이 다섯 번”(고후 11:24)이라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그가 권투 선수가 머리에 심한 타격을 받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이 39대의 채찍을 맞았다고 이해하고, 그가 “은혜와 사도직을 받아(received, lambanō의 변형)[능동태] 믿음의 순종을 가져오는”(롬 1:5) 사람들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역시 그러한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기가 생명을 받는 것과 같이 수동적인 방식으로 어떤 신성한 작용을 받는다고 이해합니다. 마찬가지로 로마서 5장 18절과 19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한 번의 의의 행위가 인류 전체에 미친 영향을 아담의 불순종이 미친 영향과 비교하고 있는데, 15절과 17절에서 그는 전자가 후자보다 훨씬 더 크고 광범위하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약학자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본문에 대한 보편구원론적 해석을 전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5:17에서] “받는다(receiving)는 단어는 … 우리가 공짜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는 은혜와 공짜 선물이 넘쳐나는 충만함 속에서 수동적인 수혜자로 간주된다.”4라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말해, 바울에 따르면, 우리는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를 경험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한 번의 의로운 행위로 인한 유익한 결과를 경험하기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둘째, 무는 다음과 같은 형식의 논리적 오류가 있는 논증을 바울에게 귀속시켰습니다.
(1) 넘치는 은혜를 받는 죄인들만이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의 혜택을 얻고” 따라서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2) 모든 죄인이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의 혜택을 얻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이 논증의] 전제는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넘치는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제시하고, 결론은 따라서 일부 죄인은 그 필수 조건을 결코 충족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추론을 이끌어냅니다. 그러나 이 추론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똑같은 형태의 다음 추론도 마찬가지입니다: ‘끝까지 신실함을 유지하는 신자들만 성화될 것이므로 모든 신자가 성화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심지어 바울이 그가 분명히 그랬던 것처럼 람바노(lambanō)를 수동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5:18을 설명하기 위해 5:17에 호소하는 무의 주장은 무가 본문에 적용한 것과 같은 잘못된 추론을 바울에게 돌리는 것에 불과합니다. 바울 자신이 이와 유사한 잘못된 추론을 한 것이 아니라면, “신중한 언어로 표현된 17절”이나 “의를 얻는 수단으로서의 믿음에 대한 지속적인 강조”는 바울이 5:18의 두 번째 “모두”를 첫 번째보다 더 제한적으로 의도했다는 어떤 함축도 전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오직 특정한 사람들[즉, 모든 죄인이 아닌 일부 죄인들]만이 그리스도의 의의 행위로부터 유익을 얻는다”는 무의 결론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훨씬 적습니다. 정반대입니다. 바울이 5:18에서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에게 “의롭다 하심과 생명”을 가져다 준다고 명시적으로 확언한 것은 이미 그러한 의롭다 하심과 생명에 필요한 모든 조건이 결국에는 충족되리라는 것을 필연적으로 함축합니다. 따라서 무가 올바른 믿음이 이러한 필수 조건 중 하나라는 점을 올바르게 지적한 것만으로는 5:18의 두 번째 “모든”의 보편적 범위에 문제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따라서 기독교 보편구원론을 비판하기 전에, 유능한 비평가라면 누구나 그러듯 정확하게 이해하기 원한다면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독교 보편구원론의 지지자들은 어떤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는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가 결국에는 모든 관련된 조건들이 실제로 충족될 것을 보장한다고 믿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19절에서 “많은 사람”(the many)을 사용한 것이 18절의 “모든 사람”을 단지 적지 않은 수로 축소시킨다는 마틴의 제안을 생각해 보십시오. 안타깝게도 이는 15절에서 바울이 모든 인간 죄인의 그룹 또는 부류 내에서 “한 사람”과 “많은 사람”을 구분한 바울 자신의 설명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처음 죄를 지은 아담 자신을 의미하고 “많은 사람”은 아담의 죄로 인해 죽은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존 머레이는 보편주의에 대한 자신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틴이 제시한 종류의 논증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지적했습니다:
바울이 “많은 사람”(the many)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 그는 그 대상을 한정하려는 의도가 없습니다. “많은 사람”(the many)의 범위는 12절과 18절의 “모든 사람”(all men)과 동일해야 합니다. 그는 19절에서와 같이 여기서 “많은 사람”(the many)을 사용하는데, 이는 “한 사람”(the one)과 “많은 사람”(the many), 단수와 복수를 보다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한 목적에서입니다 – “한 사람”(the one)의 범죄였지만 … 그 결과 “많은 사람”(the many)이 죽었습니다.5
게다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한 사람”, 즉 아담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주장했는데(14절), 이것은 아마도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가 첫 번째 아담이 “많은 사람”과 맺었던 것과 같은 관계에 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the many)이 죽었거든 하물며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이 많은 사람(the many)에게 얼마나 더 많이 넘쳤겠습니까!” (15절-NIV). 그러므로 바울은 첫 번째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을 제외한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하나의 인간 집단, 즉 ‘많은 사람'(the many)을 염두에 두고 두 아담이 그 하나의 인간 집단과 동일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아담의 불순종 행위는 그들 모두에게 파멸을 가져왔지만, 두 번째 아담의 순종 행위는 아담의 불순종의 영향보다 훨씬 더 크고 광범위한 영향(따라서 “얼마나 더 많이”라고 표현)으로 그 파멸을 취소하고 결국 그들 모두에게 칭의와 생명을 가져올 것입니다. M. C. 드 보어(M. C. de Boer)의 말을 빌리자면, “18-19절의 보편구원론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 . ‘얼마나 더 많이’는 ‘얼마나 더 적게’로 바뀌고, 그러면 죽음이 대다수 인간에게 최후의 판결로 내려지고, 하나님의 주권을 위해 세상을 되찾는 일은 제한적인 일이 됩니다.”6 그러나 아를란드 J. 훌트그렌(Arland J. Hultgren)이 말했듯이, “아담이 옛 시대에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었듯이, 그리스도는 새 시대에 인류의 머리로서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심과 생명으로 이끄십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아담의 범죄와 그 결과보다 ‘훨씬 더’ 큽니다(5:17). 여기에는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포함됩니다.”7
바울 사상의 더 넓은 맥락
보편구원론에 반대하는 사람들조차도 때때로 로마서 5장 18절이 그 자체의 맥락에서 볼 때 명시적인 보편구원론을 가르치는 것처럼 보인다고 인정합니다. 실제로 존 머레이 정도로 권위 있는 보수적인 학자도 위의 인용문에서 그런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는 본문의 명백한 보편구원론적 의미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울 사상의 더 넓은 맥락에 호소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가 ‘보편적 구원을 말하는 것이 바울적인가?’와 같은 질문을 할 때, 그 대답은 단호하게 부정적이어야 합니다(참조, 살후 1:8, 9). 따라서 우리는 [롬 5장] 18절의 후반부를 전면적인 보편구원론의 의미로 해석할 수 없으며, 제한적인 함축을 갖는다고 보는 것이 건전한 정통적 해석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에서 바울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모든 사람이 살아나리라”라고 말합니다. 맥락에서 알 수 있듯이 사도는 여기서 생명으로의 부활, 즉 그리스도에 속해 있고 그가 다시 오실 때 부활할 사람들의 부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두 번째 부분에 나오는 “모든”은 첫 번째 부분의 “모든”과는 달리 제한적인 의미입니다. 롬 5:18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후반부의 “모든 사람”에서 도입부의 “모든 사람”에 없는 제한을 파악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8
위의 인용문의 첫 번째 문장은 특히 보편구원론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는 방법이라는 우리의 주요 주제와 관련이 있으므로 곧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머레이 역시 명백히 잘못된 추론의 희생양이 되었음을 지적하고 싶은데, 이는 실제로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무의 추론과 같은 종류의 추론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의 두 번째 “모든”이 “그리스도에 속해 있고 그가 다시 오실 때 부활할 사람들”로 제한된다는 머레이의 전제로부터 두 번째 “모든”이 첫 번째 “모든”보다 더 제한적이라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얻으려면 첫 번째 “모두”에는 결코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을 일부가 포함된다는 추가 가정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이는 논점(論點)을 선취(先取)하는 가정(역주: 논증해야 할 것을 미리 전제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칼빈주의자인 머레이는 택함받은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즉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알기 훨씬 전부터, 그리고 의식적으로 그리스도와 자신을 관련짓기 훨씬 전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맥락에 대한 머레이의 이해를 받아들인다고 해도, 고린도전서 15장 22절과 그것의 직접적 맥락으로부터 온 인류가 세상의 기초가 놓일 때부터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었다는 추론을 이끌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추론은 머레이의 추론과 달리 적어도 타당한 추론(valid inference: 전제로부터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 나오는 추론)이라는 미덕이 있습니다.
사실, 머레이는 문제를 정확히 거꾸로 파악한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15:22의 첫 번째 “모든”(all)은 두 번째보다 오히려 더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전 인류에 대한 두 개의 병렬적인 진술을 한 직후에 두 번째 “모든”을 아담의 후손뿐만 아니라 경쟁하는 모든 의지를 포함하도록 즉시 확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모든 의지와 대적하는 권력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복종시킬 때까지 계속 통치하셔야 하며(15:24-27), 이 “모든 것”에는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 자신입니다(15:28). 마지막으로 멸망할 원수는 죽음이며(15:27), 이는 바울 사상의 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과의 모든 분리를 포함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하나님과의 모든 분리를 극복하실 때,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아버지께 복종시키시는 것과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될 것입니다(15:28) – 제가 여러 곳에서 주장했듯이, 이 의미는 자발적이고 기쁜 순종을 함축합니다. 그래야만 아버지는 진정으로 “모든 것 안의 모든 것”이 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모든 사람들이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 속하게 되거나 적어도 자신이 아버지께 속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머레이는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을 인용하는 것만으로도 로마서 5장과 고린도전서 15장에 표현된 보편구원론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명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찰스 핫지(Charles Hodge)는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전반에 걸쳐서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살후 1:9에서와 같이 모든 사람이 구원받지는 못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로마서 5:18의] 이 [보편구원론적] 해석은 성경의 영감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정할 수 없다.”9 겉으로 보기에 이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 주목할 만한 주장입니다: 첫째, 많은 기독교 보편구원론자들이 핫지만큼이나 성경의 영감을 강력하게 믿어왔기 때문이고, 둘째, 누구든 편협하게 비판하려 한다면 핫지에 대해 같은 종류의 논증을 쉽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핫지의 주장과 정반대되는 다음과 같은 주장도 이 지점에선 똑같이 설득력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 전반에 걸쳐서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로마서 5장, 로마서 11장, 고린도전서 15:20-28에서와 같이 보편적 화해를 분명히 가르치기 때문에, 데살로니가후서 1:9에 대한 핫지의 해석은 성경의 영감을 인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인정할 수 없다.” 이 반론에서 알 수 있듯이, 성경의 영감 문제는 지금 맥락에서는 논점을 흐리는 관련 없는 문제이며, 여기서 중요한 쟁점은 성경의 영감이 아니라 본문에 대한 올바른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 즉 로마서 5장 18절의 올바른 해석과 관련하여 머레이와 핫지가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 호소하는 것은 심각한 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런 어려움 없이 그들의 주장을 뒤집어서 반대 방향으로 타당하게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편구원론적 관점에서 자신 있게 성경을 읽는 데 중요한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그러한 성경 읽기에 반대하는 가장 흔한 논증들을 뒤집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를 인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신약성경에는 처음에는 조화시키기 어려워 보일 수 있는 두 가지 두드러진 주제, 즉 죄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전한 정복과 승리라는 주제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 형벌이라는 주제가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1장, 고린도전서 15장, 그리고 골로새서 1장 15~20절에 재현되는 오래된 신조적 찬송(the old creedal hymn) 등의 본문은 첫 번째 주제를 보여주는 반면,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 양과 염소의 비유(마 25:31-46),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눅 16장) 등의 본문은 두 번째 주제를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가능한 한 가지 반응은 이 두 주제가 단순히 양립 불가능하므로 조화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알미니안, 칼빈주의자, 조지 맥도날드 유형의 보편구원론자들처럼 그러한 비일관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두 방향 중 한쪽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각각 상대방과 정반대되는 방향일 뿐입니다. 머레이나 핫지처럼 심판을 말하는 여러 본문들이 어떤 죄인들은 지옥에서 끝없는 보복을 받을 운명이라고 가르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은 그런 추정된 가르침에 비추어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와 성취에 대한 이해를 조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보편구원론자들처럼 특정 본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결국 전 인류를 자신과 화해시킬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비슷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그런 추정된 가르침에 비추어 조정할 것입니다. 한쪽의 논증 방식은 다른 쪽의 논증 방식을 뒤집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단순히 막다른 골목이나 교착 상태에 빠진 것일까요? 제 생각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 혹독함을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끝없는 자비의 표현으로 이해하는 정확한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혹독한 자비(God’s Severe Mercy)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불순종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혹독하심, 죄에 대한 심판, 심지어 불순종하는 자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굳어지게 하시려는 그분의 의지는 보다 근본적인 성품인 자비의 표현이며, 그 자체가 그분의 정결케 하시는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11장 7절에서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이스라엘은 그들이 추구하던 것을 얻지 못했습니다.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것을 얻었지만, 나머지는 마음이 굳어졌습니다.”(또는 눈이 멀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즉시 묻습니다. “그들[마음이 굳어지거나 눈이 먼 자들]이 걸려 넘어졌습니까?” 그리고 그의 대답은 가장 단호했습니다. “결코 아닙니다!” (11:11). 다음 구절이 끝날 무렵, 그는 이미 그들을 완전히 포용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걸려 넘어짐이 세상의 부를 의미하고, 그들의 패배가 이방인의 부를 의미한다면, 그들의 완전한 포용은 얼마나 더 많은 것을 의미하겠습니까!” (11:12).10 그리고 세 구절 후에 그는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죽음으로부터의 생명”(11:15)을 의미한다고 암시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모든 것을 일반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마음을 굳게 하신 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는 수단으로서(롬 11:25-26), 즉 눈이 멀고 마음이 굳어진 자들을 포함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에는 여기서 보편구원론적 함의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1장에서 구체적으로 말하고자 한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원수”(11:28)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불순종한 것은 그들도 이제 자비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11:31-NIV). 그러나 (이러한 구체적인 요점이 하나의 사례가 되는) 일반적인 원리는 훨씬 더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불순종으로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함입니다”(11:32- 강조 추가).11
그러므로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자비로우시지만, 우리는 때때로 그분의 자비(또는 정결케 하시는 사랑)를 혹독함, 심판, 형벌로 경험합니다. 우리가 순종의 삶을 살면 자비를 친절로 경험하고, 불순종의 삶을 살면 혹독함으로 경험합니다(11:22 참조). 바울 자신은 이것을 신비라고 불렀고(11:25), 하나님의 길은 바로 이 점에서 “헤아릴 수 없고” “찾을 수 없다”(11:33)고 인정했지만, 11:32에서 그가 모든 것을 영광스럽게 요약한 것보다 더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만약 11:32의 첫 번째 “모든”이 아담의 모든 인간 후손들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불순종으로 “갇혀 있다”면, 두 번째 “모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모두는 신성한 자비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보편구원론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부 사람들처럼 “모두”가 문자 그대로 “예외 없이 모두”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그에 대한 분명한 대답은 로마서 5:18과 고린도전서 15:22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모두”의 범위보다 병행구조(parallelism)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불순종으로 “가두어 두신” 바로 그 사람들, 즉 하나님께서 한동안 눈을 멀게 하시거나 마음을 굳게 하시거나 끊어 버리신 바로 그 사람들이 바로 그분이 자비를 베푸시는 사람들이며, 그분의 앞선 행위는 나중 행위의 첫번째 표현에 불과하고, 나중 행위는 앞선 행위의 목표에 해당합니다. 하나님은 결국 통회(痛悔)하는 영을 만들기 위해 마음을 굳게 하시고, 진리에 대해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을 궁극적으로 진리에 이르게 하기 위해 눈을 멀게 하시며,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시기 위해 [그들] 모두를 불순종으로 가두십니다.”
그러나 바울이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진정으로 자비로우시다고 보았다면, 이것을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의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주장이나 마태복음 25장 46절의 “어떤 사람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갈 것”이라는 주장, 또는 누가복음 16장 26절의 부자가 고통받는 곳과 아브라함의 품에서 위로를 받는 나사로가 있는 곳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수렁이 존재한다는 주장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요? 기독교 보편구원론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략 중 하나는 많은 영어 성경에서 “영원한” 또는 “영속적인”으로 번역되는 “아이오니오스”(aiōnios)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는 시대에 걸쳐 지속되는 또는 한 시대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멸론자나 끝없는 지옥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통 이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아서 W. 핑크(Arthur W. Pink)는 “그리스어 단어인 … . ‘아이오니오스'(aionios)의 의미와 범위는 “보이는 것은 일시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고 바울이 언급한 고린도후서 4:18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분명히 정의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핑크에 따르면, “‘영원한’ 것이 단지 ‘시대 동안 지속되는’ 것이라면, 일시적인 것과 제대로 대조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합니다.12 그러나 물론 어떤 유사 플라톤적 의미에서 영원한 것을 시간적인 것과 대조해야 한다면, 영원한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것으로서 시간적 지속성을 함축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끝없는 시간적 지속성에 대한 함축도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핑크와 같이 “아이오니오스”(aiōnios)가 끝없는 시간적 지속성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매우 다른 전략을 취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이 그리스어 형용사를 선물로 주고, 구체적인 경우에 그 형용사가 가리키는 명사로 주의를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에서 “영원한 멸망”(eternal destruction)으로 자주 번역되는 표현을 생각해 봅시다. 여기서 관련된 멸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죄인인 한 개인이 소멸(annihilation)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아니면 바울이 옛사람이라고 불렀던 것, 즉 구원을 위해 멸망(destruction)되어야 하는 바로 그것이 완전히 멸망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할까요? 어떤 이해가 하나님의 혹독함이 언제나 그분의 자비의 표현이라는 바울 자신의 주장과 더 잘 맞을까요? 사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 5절에서 “너희가 이 사람을 육체의 멸망을 위해 사탄에게 넘겨주어 주의 날에 그의 영이 구원을 얻게 하라”고 기록할 때 멸망(“올레트로스”, olethros)에 대해 정확히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멸망은 매우 혹독한 수단이지만 명백히 교정의 수단이며, 데살로니가후서 1장 9절의 맥락에서 이와 유사한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멸망이라는 개념 자체가 구속과 관련된 개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아이오니오스”(aiōnios)의 정확한 번역 문제는 거의 뒷전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저는 여기서 “아이오니오스”(aiōnios)라는 단어에 대해 간단하고 전혀 논란의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형용사이므로 형용사처럼 기능해야 합니다. 형용사는 종종 다양한 의미를 가지며, 때로는 형용사를 지칭하는 명사가 다른 범주의 사물을 의미할 때 그 의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마태복음 25:46에 관한 가장 유명한 논증 중 하나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영생이 끝이 없는 생명이라면, 영원한 형벌도 마찬가지로 끝이 없는 형벌이어야 한다는 논증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어에서 영어로 바꾸어 이 주장의 결함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영어 단어 “영원한”(everlasting)의 정확한 의미가 맥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영원한 투쟁은 의심할 여지없이 끝이 없는 투쟁, 즉 해결의 지점에 도달하지 못하고 결코 완료되지 않는 끝없는 시간적 과정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변화, 영원한 교정, 영원한 변혁은 끝이 없는 시간적 과정일 필요도 없고, 결코 완성되지 않는 시간적 과정일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제한된 기간의 시간적 과정일 수도 있고, 심지어 순간적인 사건일 수도 있으며, 영원히 지속되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로 종결될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6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과 형벌이 서로 다른 범주에 속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조에, zōē)은 하나님과 올바르게 연관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목적, 즉 그 자체로 가치가 있거나 가질 가치가 있는 것이라는 점이 분명한 한편, 형벌(콜라시스, kolasis)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는 점이 마찬가지로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콜라시스”(kolasis)라는 단어는 교정의 수단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가 보복적 형벌을 뜻하는 일반적인 단어인 “티모리아”(timōria)라는 단어를 선택했다고 하더라도 가혹한 언어만으로는 교정 목적이 없다고 추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가장 가혹한 심판조차도 자비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로마서 11장의 바울의 명백한 가르침을 고려할 때, 다른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신성한 형벌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형벌을 받는 사람의 유익을 위해 집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게 되면, “에이스 콜라신 아이오니온”(eis kolasin aiōnion)을 “영원한 교정으로”로 번역하든, “영속적인 교정으로”나 “다가오는 시대와 관련된 교정으로”로 번역하든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건널 수 없는 깊은 수렁에 관해서는, 이 비유를 문자 그대로 역사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음부(Hades)와 아브라함의 품 사이의 깊은 수렁을 영원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십자가가 이미 죄와 죽음의 궁극적인 멸망을 보장했으며,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멸망할 마지막 원수”는 “죽음” 그 자체라고 믿지 않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서 예수님이 옥에 갇힌 영들(또는 노아 시대에 불순종한 자들)에게 설교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베드로전서 4장 6절에서도 죽은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묘사될 때, 이 본문들은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른 모든 사람은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분은 건너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은 저 깊은 골짜기를 건너실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건너셨다고 믿는다”고 쓴 엘하난 윈체스터(Elhanan Winchester)의 견해13를 완벽하게 증명하지 않습니까?14 이 비유의 세부 사항을 우리가 그래야 하는 것보다 더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더라도,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여전히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까지 건널 수 없었던 이 골짜기를 건널 수 있게 해주신 수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의 틈새로 몸을 던져 그 위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죽은 자들의 거처인 음부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회개와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안타깝게도 여기서는 시간 제약으로 인해 이러한 문제들을 자세히 논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몇 개의 본문에 대한 이 논의가 비록 개략적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 요점을 보여 주었기를 바랍니다. 첫째, 로마서 11장의 바울의 가르침에 따르면 불순종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혹독함은 순종하는 자에 대한 친절함 못지않게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의 표현이며, 둘째, 이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인다면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성경적 주제를 적절하게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이른바 악인의 영원한 멸망을 바울이 우리의 죄악된 본성인 옛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의 최종적인 멸망으로 해석할 수 있고, 또한 이른바 악인의 영원한 형벌을 악인의 영원한 교정 또는 변화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사이의 지금까지 건널 수 없었던 깊은 수렁은 예수님만이 실제로 다리를 놓으실 수 있었던 틈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탈봇(Thomas Talbott)
윌라멧 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Emeritus Professor of Philosophy Willamette University)
- 달리 표시하지 않은 한, 여기에 인용된 모든 성경 구절은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of Christ)가 1989년에 출판한 「새 개정 표준판」(the New Revised Standard Version)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
- Douglas J. Moo, Epistle to the Romans (Grand Rapids: Eerdmans, 1996), p. 344. ↩︎
- Ralph P. Martin, “Romans” in D. Guthrie, J. A. Motyer (eds.), The New Bible Commentary: Revised (Grand Rapids: Eerdmans, 1970), p. 1026. ↩︎
- John Murray, Epistle to the Romans, Vol. I (Grand Rapids: Eerdmans, 1968), p. 198. 리처드 벨(Richard Bell)도 보링(M. E. Boring)을 따라 비슷한 지적을 한다. Richard Bell, “Rom. 5:18-19 and Universal Salvation”, New Testament Studies 48.3 (2002), p. 429. 또한 Boring, “The Language of Universal Salvation in Paul,” Journal of Biblical Literature 105 (1986), pp. 269-92. 참조. ↩︎
- Murray, op. cit., pp. 192-193. ↩︎
- M. C de Boer, Defeat of Death: Apocalyptic Eschatology in 1 Corinthians 15 an Romans 5 (Sheffield, UK: Sheffield Academic Press, 1988), p. 175. ↩︎
- Arland J. Hultgren, Christ and His Benefits: Christology and Redemption in the New Testament (Philadelphia: Fortress Press, 1987), pp. 54-55. ↩︎
- Murray, op. cit., p. 203. ↩︎
- Charles Hodge, Commentary on the Epistle to the Romans (New York: Armstrong, 1896), p. 270. ↩︎
- 하나님께서 자비의 표현으로 마음을 굳어지게 하신다는 함축을 피하기 위해, 일부 주석가들은 바울이 여기서 집단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즉, 11:11의 “그들”]은 모든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때때로 다른 개인들로 구성되어 대대로 이어지는 실체로 생각되는 집단 전체로서의 이스라엘을 가리킨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로마서 9-11장의 보편구원론?” 12).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11:7에서 바울은 세 그룹의 사람들을 언급했습니다: 이스라엘 또는 민족 전체, “택함 받은 자” 또는 신실한 남은 자, 그리고 “나머지,” 즉 남은 자가 아닌 마음이 굳어진 유대인들입니다. 이제 11:11에서 “그들”의 선행사는 신실한 남은 자들일 수 없습니다. 그들[신실한 남은 자들]은 걸려 넘어지고 마음이 굳어진 자들이 아닙니다. 집단 전체로서의 이스라엘 민족일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 민족 안에서 걸려 넘어지지 않고 마음이 굳어지지 않은 신실한 남은 자와 걸려 넘어지고 마음이 굳어진 “나머지”라는 두 그룹을 구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1:11에서 “그들”의 선행어는 “나머지”, 즉 하나님이 마음을 굳어지게 하신 바로 그 남은 자가 아닌 유대인들임이 틀림없습니다. 존 머레이조차도 다음과 같이 질문하면서 이를 사실상 인정했습니다: “[11절에서] 그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7절의 ‘나머지는 마음이 굳어졌다’에서 가리키는 사람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여기서 22절의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 ‘넘어진 자들을 향하여, 혹독함'” (Epistle to the Romans, Vol I, 75, n. 18). 대답은 “그렇다”와 “그렇다”입니다. 그러나 머레이는 하나님의 혹독함이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이 자비의 표현일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넘어진 자들은 최종적인 결과로서 타락했다”고 계속해서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11절에서 “그들이 가리키는 대상”은 머레이도 인정했듯이 “7절에서 가리키는 사람들과[만] 동일”한 것이 아니라, 12절에 언급된 자들과도 동일합니다. 이들은 “완전한 포용”이 그들의 완전한 포용을 가능하게 한 걸려 넘어짐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할 사람들입니다. ↩︎
- 신약학자 제임스 던(James Dunn)은 “하나님은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일부를 완고하게 하시고,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기 위해 모두를 불순종하게 하신다”(Romans 9-16, 696)라고 이 점을 정확하게 요약했습니다. ↩︎
- A. W. Pink, “Eternal Punishment, ” 6절 참조.
http://www.reformed.org/eschaton/index.html?mainframe=/eschaton/pink_eternal_punishment.html ↩︎ - 저는 여기서 어거스틴이 이 본문을 우회하기 전까지 초대 교회, 특히 동방 교회에서 지배적이었던 이 본문에 대한 해석을 채택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해석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제가 보기에 전혀 설득력이 없는 것들입니다. 어떤 이들은 3:19에서 “옥에 갇힌 영들”이 불순종한 인간의 영이 아니라 타락한 천사라고 주장하고, 또 어떤 이들은 4: 6에서 베드로전서가 작성되기 전에 죽은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누군가에 의해 복음이 선포되었던(수동태) 것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는 여기서 그러한 주석적 논쟁을 해결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가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 사이에 지금까지 건널 수 없었던 골짜기를 건너는 다리를 놓았다는 생각은 이 본문에 대한 특별한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 Elhanan Winchester, The Universal Restoration Exhibited in Four Dialogues between a Minister and His Friend (Philadelphia: Gibon, Fairchild & Co., 1845), p. 25. ↩︎